순백의 눈 같은 하얀 도화지 위에 첫 마음을 새긴다. 올해는 더욱 단단한 열정으로 내게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가겠노라고. 무사 무사히, 건강하고 온유하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 가족에게 단아한 예절로. 첫 마음을 쓰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는 걸 안 후로, 간혹 헛발을 뗄 때도, 무례할 때도, 버럭 궤도를 이탈할 때도 있음을 안다. 그때마다 넘어지지 않게 잘 지탱할 그 어떤 의지를 가슴 한쪽에 달고 살자.
새날을 다듬기 위해 책가도를 그렸다. 해마다 이맘때쯤 아버지는 가마니를 짜셨다. 추수한 곡식을 담을 가마니였다. 아버지가 가마니를 짜듯 나의 양식이 될 책들을 가지런히 훑어본다. 옛사람들의 책가도도 마음의 양식을 채운다는 의미였으리라.
연말에 영화 한 편을 보는 사치를 누렸다. 몇 년 만인 것 같다. 조용히 혼자 보려 했는데 어찌해 탄로가 나고 가족이 모두 알게 됐다. 명절을 빼고 단 하루도 집에서 뒹굴어 본 적이 없었고 무엇을 하든 매일 새벽, 어둠을 뚫고 집을 나섰던 나였다. 혼자 망중한을 내본 것은 처음이었다. 양심이 죄악처럼 상했다.
내가 본 영화는 노량이었는데 부제로 붙은 죽음의 바다가 마음을 저리게 했다. 나라에 충성하며 목숨을 바쳤지만, 가족을 지키지 못한 이순신의 어깨 너머에 한 무인의 고독하고 강인한 자신과의 결기가 눈물 끓게 했다.
좋은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나듯 뭉클하고 가슴 끓는 감동의 한 해가 됐으면. 이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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