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장자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꿨다.
꿈에 나비가 돼 한가롭고 자유롭게 훨훨 나는 꿈이었는데 나 스스로 기분이 좋아 내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이윽고 잠을 깨니 틀림없는 인간인 나였다. 도대체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이 인간인 나로 변해 있는 것일까.
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금강경에도 비슷한 꿈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하라.
우리네 삶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처럼 보라는 말씀이다. 이 장자의 호접몽과 불교 금강경의 여몽환포영 두 내용을 읽고 있자면 순간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맛볼 수 있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변한 듯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삶의 현장에서 여러 사람과 부딪쳐 살다 보면 이런 자유로움은 멀리 달아나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그 속에서 또다시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 것으로 온전히 자리 잡지 않았으니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한 자유로움이었다. 절대의 경지에 이른 성인들이나 영원히 누릴 수 있지 우리에겐 잠시뿐이다.
그러나 장자의 이야기가 이처럼 먼 남의 지혜인 것만은 아니고 내 것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지혜도 있다.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유용지용(有用之用)과 무용지용(無用之用)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쓸모 있는 것의 쓰임새는 알지만 쓸모없는 것의 쓰임새는 알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하늘로 쑥 뻗은 잘 생기고 소위 쓸모 있다는 나무는 빨리 잘려 집 짓는 용도나 가구의 용도나 물건 나르는 배로 사용되는 등 그 나무의 쓰임새로 인해 통으로 베어지거나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찢겨 땅에 떨어진다.
이는 나무의 타고 난 쓸모로 인해 그 삶이 고통스러워지는 일이어서 타고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일찍 중도에 베어져 죽으니 세상을 살며 희생을 자초한 꼴이다.
반면 못생기고 옹이가 많고 가지가 굽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는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나 천수를 다하고 있으니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다.
무용지용의 가치. 외형적으로 분명 쓸모가 없지만 생명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는 정말로 가장 큰 쓰임새였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유용에만 맞춰져 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지식을 과시해 그 쓰임새가 많아지면 높은 임금과 지위가 올라가니 당연히 유용지용의 가치만을 추구한다.
정치인, 기업가, 연예인 등 잘나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의 길로 접어드는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유용지용의 가치만을 추구한 탓일 것이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는데 이는 무용지용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작은 지식에서 비롯된 유용지용의 쓸모를 큰 지혜인 무용지용의 쓰임새로 자신을 변화시켜 마음의 평온과 자유를 맛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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