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은, 아직 문이 닫히지 않아 꼬리를 보이고 있지만 잊히는 것은, 마음 밖으로 떠나버린 것. 어떤 심상도 도달하지 않은 채 형상의 부재가 돼 가는 망각은 참으로 무섭다. 사랑도 미움도 아닌 건축물 하나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나의 화실은 5층 꼭대기 옥상에 붙어 있는 조그만 방이다. 가끔 작업하기에 비좁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나의 벽면 한쪽은 웬만한 크기는 수용할 만한 화판이 돼 주고 있다. 그러나 계절에 매우 민감한 방이다. 하늘과 마주한 지붕은 땡볕이 무방비로 스며들고 겨울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삭풍이 얇은 벽으로 파고든다. 그래도 봄가을은 민감해 좋다. 뒷문을 열면 파란 하늘과 마주하고 건너편 가까이 팔달산이 눈높이에 있다. 꽃이 피고 지며 눈이 오고 비바람이 부는 풍경을 계절 따라 느낀다.
눈이 내리면 바로 아래 내가 40년 넘게 살아온 교동의 부국원, 성공회 등이 보이고 소문으로만 전해 들은 일본군 헌병대의 건물 한 채가 있었다. 낡은 목조 건물이지만 담쟁이넝쿨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후배가 화실로 사용하고 있던 이 건물과 넓은 마당(주차장)이 사라졌다. 한 건설회사가 이 땅을 매입해 커다란 빌딩을 짓게 된 것이다. 문화재 유물조사단이 몇 달간 땅을 걷어내며 발굴을 마친 후였다. 참으로 잠깐 사이에 내 화실 주변은 모든 게 바뀌고 사라졌다. 뒷문 밖에는 공사가 진행 중인 높은 건물이 가로막고 있다.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들은 사라지고 목련꽃이 피는 모습도 벚꽃 핀 팔달산의 모습도 가려져 잊히고 있다. 어찌하랴! 나도 많은 세월에 이렇게 변해버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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