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미 동맹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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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동두천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

올해는 한미동맹 70주년과 휴전협정 70주년이 되는 해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유엔은 한국 군사원조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트루먼 대통령은 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미국은 한국을 방어할 법률적 책무는 없었다며 미 극동사령부 역시 북한 움직임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사태가 심각했다. 고향 미주리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다가 전쟁 소식을 전해 들은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급히 돌아와 첫 긴급 국가안보회의(NSC)를 열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참석자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정책 목표를 또 다른 세계 대전 예방에 뒀다. 북한의 침공은 독립국가에 대한 공산당의 전복 시도 행위이며 나아가 침략과 전쟁임이 명백하다고 인식하고 신속한 참전을 결심했다. 전쟁 발발로부터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해군과 공군 정도만 지원하면 북한 침략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지상군 참전은 고려하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 3일째인 6월27일 제2차 NSC를 열고 한국군 지원과 제7함대 대만해협 봉쇄 명령을 했다. 그 이튿날부터 주일 미 제5공군 소속 B-26 폭격기가 출격해 북한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북한군이 남진(南進)을 계속해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자 6월29일 맥아더 사령관은 한강전선을 직접 시찰한 뒤 북한군이 한국군을 압도한다고 판단해 지상군 투입을 건의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20일 제3차 NSC에서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곧바로 일본에 주둔한 미8군 제24사단을 투입했다. 월리엄 딘 사단장은 제21연대 1대대 일명 스미스부대를 한반도로 급파했다. 부산에서 대전을 거쳐 경기 오산에 투입된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는 7월5일 최초 전투를 벌였다. 3년간의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장병이 전사했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아직도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계속되고 있다. 자주국방 태세를 다지는 우리나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확고한 안보 결의를 생활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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