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구한 영웅의 후예
며칠 전 6·25전쟁 참전용사인 80대 노인이 극심한 생활고로 마트에서 반찬을 훔쳐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물론 훔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으나 그를 돕겠다는 따뜻한 소식 또한 전해졌다. 부산진경찰서는 후원 명단을 정리해 부산보훈청에 전달했다.
올해로 6·25전쟁 발발 73주년을 맞았다. 1950년 그날도 올해와 같은 일요일이어서 더욱 되새기게 만든다. 북한이 기습 남침한 1950년 6월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3년간 지속된 전쟁은 한국민뿐 아니라 세계 20여개국의 수백만 군인이 참전한 만큼 천문학적인 인적·물적 피해를 낳으며 여전히 우리 민족의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
전쟁이 발발하자 ‘비상경비사령부체제’로 전환한 전국 4만8천명의 경찰은 열악한 무기를 들고 북한 정규군에 자랑스럽게 맞섰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전쟁 기간 동안 경찰 3천131명이 전사했으며 7천84명이 실종됐다. 전 경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대한 인원이지만 그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1만5천명의 경찰이 유엔군에 배속돼 활동했는데 그중에서도 미군에게서 특별훈련을 받고 별도 편제된 경찰관들을 ‘화랑부대’라 불렀다.
경남경찰청 수장고에서 경찰화랑부대의 장진호전투 활약이 담겨 있는 ‘유엔군종군기장 수여대상자 조사명부’라는 책이 뒤늦게 발견되기도 했다.
지난 6월23일 경남경찰청과 함안군은 6·25전쟁 경찰승전탑(2011년 건립) 옆에 ‘함안경찰승전기념관’을 준공했다. 전투경찰의 공적을 기리는 첫 기념관이라 의미가 남다르다. 1950년 여름 낙동강방어선(워커라인)에서 한곳이라도 인민군에게 뚫리면 대한민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중 함안지구 방어전투는 북한 인민군 6사단이 마산과 부산 점령을 목적으로 호남과 진주를 점령한 후 함안·마산을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그 이전 충남과 호남지역에서도 전투경찰부대와 학도병은 인민군 6사단에 맞서 치열하게 항쟁했다.
방호산(方虎山·본명 이천부)이 이끄는 인민군 6사단은 일반 보병부대에는 없는 T34 전차와 자주포 등이 함께 편제돼 있고 일본군과 장제스 중국 국민당 군대와도 전투한 경험이 풍부한 중국 팔로군 정예부대였다.
1950년 8월, 국군과 미군은 경북 낙동강 일대 방어에 집중해 있어 함안에는 방어 병력이 적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북·전남·경남경찰국 소속 경찰관 6천800여명과 미 제25사단은 1950년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북한군에 맞서 함안지역을 끝까지 수호했다. 미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이 전투의 승리를 가리켜 “세계 전투사에 유례없는 경찰의 승리”라고 극찬했다.
경찰에서는 민주·인권, 국가안보 등 경찰관이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를 보여주는 대표 장소를 선정해 참된 경찰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경찰역사순례길’을 개발·운영하고 있다. ‘함안경찰승전탑’과 같이 현재 운영 중인 경찰역사순례길 코스에 ‘함안경찰기념관’을 추가하고 신임 경찰들이 참배하게 할 예정이다.
70여년 전 나라를 지킨 영웅들이 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은 첨단 산업과 혁신 기술을 가진 경제강국으로 2030 부산엑스포 개최에 도전하며 역사의 페이지를 써 나가고 있다. 오로지 나라와 가족을 위해 몸 바쳐 싸웠던 영웅들, 우리는 대한민국의 번영을 경제발전의 숫자로 기억하지만 그 영웅들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다음 영웅도 기다릴 수 있다. 우리 경찰 후배들이 그 숭고한 역사의 가치와 정신을 정확히 알고 이어 나갈 수 있도록 교육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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