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고대 문명과 콜로니얼 문화가 공존하는 멕시코 여행 에세이] 13-④ 멕시코 독립의 시작… 돌로레스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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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매표소 상단에 있는 이곳이 이달고 후손의 집이였다는 표식. 박태수 수필가

 

‘돌로레스 이달고 박물관’은 멕시코 독립 투쟁의 영웅인 미겔 이달고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살았던 집을 개조한 곳으로, 독립 투쟁 당시 화살과 전투 물자를 만드는 모습을 재현한 밀랍, 전투 장비와 투쟁을 위해 주민을 교회로 부를 때 사용하였던 종이 전시돼 있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박물관이라기보다 혁명 당시 소박한 모습을 재현한 기념관이다.

 

이 도시는 미겔 이달고를 떠나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연관이 깊고, 그 표징은 ‘돌로레스 이달고 시의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문장에는 도시를 상징하는 4개의 삼각형 분기가 하나로 구성돼 있는데, 중앙 상단에는 미겔 이달고 신부가 ‘과달루페의 성모상’ 배너를 들고 독립운동을 시작한 문양이 새겨져 있을 정도다.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미겔 이달고 신부가 처형되기 전 8년간 사목한 아토토닐코 교회로 간다. 이곳은 1810년 9월16일 주일 새벽 미사에 참석한 600여명의 신자들 앞에서 “증오스러운 에스파냐 사람들이 여러분 선조로부터 빼앗은 땅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정복자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친 ‘돌로레스의 절규’를 선포한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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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쟁 당시 화살을 만드는 모습을 재현한 밀랍상. 박태수 수필가

 

미겔 이달고 신부가 요란하게 교회 종을 울리며 신자들과 함께 교회 앞 광장으로 나가자 주민들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지금 곧바로 행동해야 합니다.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라며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원주민의 항쟁을 촉발했다.

 

그 후 지지자들이 늘어나자 에스파냐 군대와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하지만 체계적인 전투 장비도 없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라 투쟁에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그는 원주민과 메스티소 중심으로 혁명군을 꾸려 독립투쟁을 시작했으나, 사회 지도층인 크레올로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항쟁 1년 만에 칼데론 전투에서 패한 후 포로로 잡혀 처형됐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멕시코 반도 남부지역에서는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신부와 누에바 에스파냐 부왕청 소속 군인이었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1821년 코르도바 조약을 끌어내는 초석이 됐으며, 그해 멕시코와 중미지역 나라는 독립을 인정받았다.

 

미겔 이달고는 훗날 멕시코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멕시코는 그가 ‘돌로레스의 절규’를 외친지 11년 후에 독립이 됐고, 1810년 9월16일은 멕시코의 으뜸 국경일인 독립 기념일로 지정됐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 화폐에는 두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초상과 문장을 새겨 영원히 기억하고 있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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