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곡하듯 웃었다. 쇠구슬 3개가 위로 굴러 올라가고 있었다.
손녀가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꼭대기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쇠구슬 3개가 동시에 아래로 굴러 여러 장애물을 통과해 한곳에 모이게 되는 재미있는 구조물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게 중력이야! 그런데 중력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게 할 수 없을까?” “위로 올라가지는 못해.” “소울이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휴일 저녁 늦은 시간, 초등학교 3학년 손녀와 주고받은 대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다시 조립에 몰두하던 손녀가 나를 불렀다. 아래쪽에 함께 있던 3개의 쇠구슬이 위로 굴러 올라가는 장면을 보여줬다. 비산하는 물방울처럼 사뿐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분명 중력을 거스르고 있었다. 구슬이 아래로 굴러 내리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거꾸로 돌렸던 것이다. 손녀의 역발상에 숨 넘어 가듯 웃었다. 아이는 지난밤 꿈속에서 중력을 거스르는 법을 깨쳤다.
중력이 우주 만물의 이치라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은 인간의 일이다. 중력을 거스르기에 물리적 에너지와 정신적 에너지가 있다. 인간의 우주탐사는 물리적 에너지의 임계상황으로 중력과의 전장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우주군의 비밀 임무 위성을 싣고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 쏘아 올린 팰컨헤비 로켓의 추력은 약 500만파운드로 승객과 화물, 연료를 가득 채운 747 점보기를 우주로 올려 보낼 수 있는 힘이라고 했다. 이는 인류사에 현존하는 최고의 반중력이다.
상대적으로 정신적 에너지는 1㎎의 추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물리적 에너지를 활성화할 수 있는 심리적 환경 혹은 근원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근원적 상상력은 마음이 창의적으로 지각하는 행위이다. 그것이 개념(concept)이다. 개념은 예술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지며 현대미술의 전부라 해도 과하지 않다. 개념화된 정신적 에너지의 추력은 한계가 없다. 시공간을 초월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 역설적으로 500만파운드의 추력은 1㎎의 물리력도 갖지 못한 정신적 에너지 진화의 척도이며 과학과 예술의 상호 동질성의 교집합이다.
아래쪽에 있던 쇠구슬을 위로 올리기에 실재하는 물리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이가 그것을 간단하게 해결했다. 그러나 개념이 공감받기 위해서는 창의적 지각행위가 합당한 차이를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합당한 차이는 3개의 쇠구슬이 위로 굴러 올라가는 현상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아이의 마음속에 환상적 혁명을 일깨워줌이다. 그 과정이 진화다. 인간이 우주로 가는 모든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현대문명의 이기를 다루는 데 도가 턴 요즘 아이들에게는 여반장이지만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고민했을 인간의 가치에 주목한다. 손바닥이 아릴 듯 박수를 쳤던 이유다. 그럼에도 모든 생명체의 탄생은 익은 감 떨어지듯 그냥 오지 않는다. 나오려는 나의 의지와 내려는 어미의 의지의 합이 맞아야 생명을 얻는다. 중력을 거스르는 어미와 자식의 고통의 합이 생명 탄생의 숭고함이다. 그 위대한 탄생은 중력과의 싸움의 시작이다.
뒤집고 앉고 직립해서 두 발로 걷는 일, 모든 과정이 중력과의 싸움이다. 중력에 순응하려는 타성과 중력을 거스르려는 진화의 속성이 맹렬하게 대치한다. 태어남(誕)과 살아감(生)이다. 그렇게 인간이 끊임없이 중력을 거슬러야 하는 이유는 내 존재 이유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다. 우주의 미아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3개의 쇠구슬이 위로 굴러 오르는 장면은 통쾌했다. 손녀의 역발상을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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