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백남준 대신 다소 낯선 백남준을 만나는 여정의 첫 관문은 ‘인스턴트 글로벌 대학’이다.
“미국 UCLA 졸업생이 페르시아나 아프가니스탄의 어떤 악기를 배우고 싶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편으로 주고 받을 수 있는 텔레비전(즉 비디오테이프)은 각자 어디서든 다양한 과목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백남준,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 중, 1968)
백 작가는 예술에 대한 접근과 공유가 손쉽게 이뤄져야 한다며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예술의 확산에 관해 흥미를 드러냈다. 이때 전화기와 텔레비전, 자그마한 게임기 등으로 만들어진 어린 아이 형태의 조형물 ‘해커 뉴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품엔 다음 세대가 자신만의 길을 찾아 개척해 나가기를 바라는 그의 바람이 담겨 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변화,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보면 그도 역시 ‘해커’처럼 보인다.
이어지는 챕터는 ‘전자초고속도로’다.
“1980년대 말이 되면 누구든 원하기만 한다면 태평양의 섬에 거주하면서 런던 사무실과 매일 텔레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될 것이다.”(백남준,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 중, 1974)
아이디어의 실시간 전송 및 공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그는 당대 사회 전환기 사회·경제·미래학자들의 저서와 정책보고서를 탐독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 백 작가는 광역통신망 혁명에 따라 시장경제에서 벗어난 비디오 공동시장을 꿈꿨다. 이곳에 전시된 ‘꽃가마와 모터사이클’에도 역시 백남준의 의중이 투영돼 있다. 그는 꽃가마와 모터사이클을 하나의 도로 위에 나란히 놓아서 시공간의 간극을 없앤 정보 공유의 장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챕터는 ‘연구소, 방송국, 미술관’이다.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항상 선구자였다. 우리는 미디어의 대안적 배급과 비판적 재평가를 위해 미술관과 대학, 커뮤니티 센터, 도서관을 활용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만든 최초의 사회적 집단이다.”(백남준, ‘PBS 공영 방송이 실험 비디오를 지속하는 방법’ 중, 1979)
60년대 후반, 백남준의 작품들은 방송국 채널에 송출되거나 학술적인 논의를 거치면서 미술관에도 전시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작가와 대중이 만나고 소통하는 네트워크 형성에 있어 사회 인프라와 제도적인 기반 등의 요소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지 이곳에 놓인 ‘글로벌 그루브’ 등의 작품이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나의 파우스트-자서전’을 통해서 백 작가는 예술가의 사회 참여에 관한 자신의 관점과 교육, 농업, 건강, 교통, 통신 등을 총망라하는 통찰력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전시를 담당한 김윤서 학예연구사는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들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데 이어 그것이 구현되기 바라는 목적으로 작성된 문서를 기준 삼아 전시의 틀을 구상했다”면서 “그가 지속했던 작업의 근간이 당대 사회적 배경과 맞물렸다는 사실이 이번 전시 구성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김성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백남준 작가 탄생 90주년을 맞아 한 해 동안 그와 계속 함께해 온 만큼, 올해의 마지막 전시는 그의 연대기를 재조명해 그가 지녔던 새로운 면모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마무리 짓고자 했다”며 “이번 특별전이 그에 대한 지평을 넓힐 수 있는 경험의 장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고민과 연구를 거듭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송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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