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청와대 역사속으로

70여년간 역대 대통령과 영욕의 세월을 함께한 청와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윤석열 당선인이 지난 20일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을 공식화 하면서 권력의 정점 그 명멸을 지켜 본 청와대가 잊혀져 갈 것이다.

청와대 터는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완공된 이궁(離宮)이 있던 곳이다. 태조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궁궐의 후원으로 쓰인 자리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의 관저로 수난을 겪었다. 일본인들이 조선 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뒤편엔 총독 관사로 뒀으며 왕실의 기운과 민족 정기를 말살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친일 잔재 청산을 강조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옛 청와대 본관을 완전히 철거했으며 지금은 구 본관 터라는 표식만 남아있다. 1945년 9월 미군정 하아지 중장 사령관 관사로 썼으며 1948년 7월 대한민국 수립 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경복궁의 ‘경’자와 궁궐 북문인 신문무의 ‘무’자를 따서 ‘경무대’라 명명했다. 이에 윤보선 4대 대통령은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점을 착안해 청와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왕조시대 임금이 기거하는 궁궐의 기와가 푸른색이고 건물 형태도 구중궁궐을 닮아 제왕적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다.

이렇다 보니 자유민주주의 방식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살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1990년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가 ‘흉지설’을 제기한 이후 청와대 터 풍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곳은 조선시대 왕자난으로부터 왕자를 낳고도 쓸쓸히 여생을 살다간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 있고 무수리들의 임시 무덤과 군사들의 무예훈련장이기도 했다. 문재인 19대 대선 후보 캠프에 참여했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승효상 건축전문과도 풍수상 불길하다고 했다.

그 때문일까 역대 대통령들은 하야, 시해, 구속, 투신, 탄핵 등 불운과 비극을 겪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 1977년 행정 수도를 이전하려 했으나 2년 뒤 시해 사건으로 백지화됐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도 청와대 이전을 추진했지만 숱한 제약으로 무산되면서 전 대통령은 대신 충주 청남대를 개방했다. 5년 전 문재인 대통령도 집무실을 세종로 정부 청사로 옮기려 했으나 포기했다.

용산을 중심으로 설계된 국방 자원 이전에 따른 안보 공백과 예산 대립으로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사람이 집을 짓지만 집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대통령 수난의 시대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명수 동두천문화원향토문화연구소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