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력은 여전하시고?” 어른들이 주고받던 아침 인사였다. 근력이 기운인지 기분인지, 갸우뚱거린 어린 시절 기억의 하나다. 그때 근력이란 어른들끼리 통하는 표현으로 담아뒀다. 그런데 요즘 실감하는 말이 근육이고 근력이다. 그것도 구체적으로 새록새록 일깨워주는 실감이다.
최근에는 ‘연금보다 근육’이라는 표현도 자주 보인다. 근육이야말로 노후를 뒷받침하는 힘이자 장수의 바탕인 게다. 건강을 잃어봐야 소중함을 깨닫듯, 근육도 소실이 일어나야 비로소 중요성을 알게 된다. 계속 다지지 않으면 근육도 노화로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대응을 마련해야 하는 게다. 그나마 남아 있는 헐렁한 근육이라도 지키자면 꾸준한 운동이 필수라는 경고다.
요즘은 시에도 근육이 많이 불려나온다. ‘마음의 근육’이라는 낯선 표현이 등장하나 싶더니 비슷한 표현들이 늘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었던가. 비유로 보면 없다고 할 수도 없으니 신선한 활용으로 다양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 근육 키우기 같은 심리프로그램이 벌써 나왔는데 ‘멘탈 헬스’ 영역에서 많이 다룬다. 특히 경쟁이 치열한 기업의 스트레스 관리로 마음 챙김이며 명상 프로그램에 활용 중이다. 한때 ‘힐링’이 유행하며 매스컴을 휩쓸더니 마음의 근육이니 회복 탄력성이 확산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실체가 없는 마음에 근육을 붙인 점에서 무척 신선했다. 회복 탄력성의 느낌이라도 더 구체적으로 뚜렷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마음 근육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자기조절력, 대인관계력, 자기동기력’이라고 한 견해를 짚어보면, 그동안 써온 표현들을 달리 집약한 거나 진배없다. 자기조절은 일찍부터 강조해온 자기 수양의 하나고, 자기동기력도 자신이 동기부여를 해야 효율적인 능력 발휘가 된다고 익히 들어온 바와 같다. 대인관계력 또한 적응과 대응 그리고 포용력과 크게 다르지 않은 표현이라 하겠다.
그보다 크게 닿는 것은 회복 탄력성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랭보)”라는 외침처럼, 살면서 누구나 상처를 주거나 받는다. 그것을 빨리 딛고 일어서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 힘을 회복 탄력성으로 보면 이 또한 마음의 근육에 상관성이 크다. 웬만한 상처쯤 훌훌 털어내려면 마음의 근육부터 단단해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예민한 사람은 상처가 물이 될 때까지 곱씹어야 천천히 낫겠지만.
마음의 근육도 결국은 자신이 키워야 하는 것. 어떤 도움도 마음이 따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러고 보면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데는 독서만 한 게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이해와 배려 같은 정신의 성장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위안과 정화도 큰 힘을 발휘하니,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카타르시스의 작용이다. 시를 읽는 일 또한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아름다운 일. 그렇게 꼭 덧붙이고 싶은 새맑은 아침이다.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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