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쓰는가. 도구를 묻는다면 연필이고 펜이다가 자판으로 바뀌었다. 손글씨 원고를 보기 어려울 만큼 모두 자판을 두드려 쓴다. 조용히 쉬는 자판을 마구 깨워내서 때리며 쓰기 부역을 시키는 것 같다.
한동안 ‘엉덩이로 쓴다’는 말이 회자됐다. 엉덩이는 의자에 꾹 눌러앉은 붙박이 시간의 비유다. 쓰기 노동을 날마다 수행하는 소설가들에게 더 합당한 표현이었다. 그만큼 쓰기라는 게 의자와 뗄 수 없이 맞물린 관계인 것이다. 작가만 아니라 모든 필자가 그러하다. 사무직도 대부분 그렇지만, 쓰기 노동자야말로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과 비례하는 쓰기가 있다.
그러고 보면 ‘엉덩이론’에 공감할 사람이 많겠다. 한때는 의자에 자신을 묶거나 졸음 대비용 바늘을 책상에 깔아놓았다는 연구자의 전설도 있었다. 지난 시절 얘기지만, 오래 앉아 있기가 쓰기의 한 전제임은 분명하다. 읽어야 쓰고, 읽은 만큼 쓰듯, 앉아있는 시간만큼 쓰기가 쌓이는 까닭이다. 쓰기의 양이 꼭 질의 담보는 아니어서 퇴고의 시간도 포함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또 다른 말도 가능하다. 글은 마감이 쓴다. 얼마 전부터 지어 쓰는 말이다. 마감이 코앞에 닥쳐서야 머리 싸매고 쓰는 필자가 많은 까닭이다. 마감이 닥치면 머릿속에 맴만 돌던 것들까지 죄다 끌려나와 쓰기에 복무하게 된다. 마감의 채근이 쓰고 고치고 다시 쓰기에 마침표를 찍게 만드는 게다. 보통 원고를 쓰고 보내는 과정을 보면 마감의 독촉이 크게 느껴진다. 마감이 곧 전쟁임은 신문사가 더할 터라 이만 줄이지만, 무릇 글은 마감이 있어서 마무리에 이르지 싶다.
그런 마감이 때로는 좋은 핑계도 된다. 마음에 덜 차는 글도 마감을 앞세워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퇴고를 해도 미흡할 때, 지친 쓰기 노동자 앞에 마감은 구세주 같다. 그렇게 또 한 편의 덜 여문 글을 지면에 내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엉덩이로 쓰거나, 마감으로 쓰거나, 쓰기라는 업에서 살아남게 하는 마감은 채근과 긴장의 든든한 근육이다.
간혹 마감에 자유롭던 필자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필자가 많아져서 마감 못 지키는 자유까지 굳이 지켜주지는 않는 것. 원고도 마땅한 것 없다고 한두 번 사양하면 이후 청탁이 끊기니 쓰기 동네 사정은 비슷하다. 그래서 매번 좋은 작품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작품을 내려 애쓰지만, 글이 영 모자라도 웬만하면 보내는 것이다. 사실 100% 마음에 드는 글은 불가능하므로 80%만 돼도 괜찮다고들 한다. 그 수준의 유지 혹은 이상의 어려움이 상존하는 가운데도.
마감, 그것이 늘 문제다. 실은 어떻게 쓰느냐가 더 문제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무서운 문제이듯. 그래도 마감이 있어 부족함도 맺고 넘어간다고 자신을 추스른다. 올해 마감은 무엇을 어떻게 칠 것인지, 두려운 직전이다. 미룬 원고부터 얼른 마무리해야겠다.
정수자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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