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청(文靑) 시절 수차례나 읽기를 반복하다가 겅중겅중 건너뛰며 읽다가 결국 완독하지 못하고 꽂아두었던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를 얼마 전에 다시 꺼내 읽었다. 그동안 어쩌다 이 작품이 화제에 오르면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곤 했던 내게 실존철학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겨준 작품이다. 이 작품을 다시 읽고 싶어진 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 해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사회는 참 복잡한 구조로 엮여 있다. 알면 알수록 더 혼란스럽다. 그래서일까. 관심은 가지지만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똑똑할수록 더 단순하게 생각하며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 반복되는 학습효과에 빠져버렸다. 보편적인 게 행복하다는 등식이 굳어진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적당히 아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질했다(더닝 크루거 효과ㆍDunning Kruger effect).
‘실존주의의 선언임과 동시에 문학예술에 대한 설득이다’라고도 하는 소설 <구토>는 문학과 철학의 경계에 서 있다. 주인공 앙트와느 로캉탱(Antoine Roquentin)은 실존과 본질 사이를 오가며 현실에서 부조화가 일어날 때마다 구토 증상을 일으킨다. 토악질이라 번역했지만, 사실은 그런 ‘증상’이다. 이 증상은 존재의 가치를 줄타기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차이와 반복’을 계속한다. 어쩌면 이것은 사르트르가 프랑스어로 ‘젊어 보이려고 하는 늙은이’라는 뜻을 가진 roquentin(로캉탱)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선택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일까.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가 20세기를 정리할 철학자라며 극찬했던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툼한 철학서를 우리에게 화두로 던졌다. 이 책 역시 젊은 날 내가 읽다가 내던진 ‘구토’처럼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올 한 해 동안 다 읽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터에 “다행히 우리에게는 사르트르가 있었다. 후덥지근한 좁은 방에 갇혀 있던 우리에게 그는 신선한 공기였으며, 시원한 뒷마당의 상큼한 바람이었다”라고 한 질 들뢰즈의 말을 발견하고 사르트르의 <구토>를 꺼내 다시 읽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하게 될 때 ‘제대로 사는 방법’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사르트르 저작 중 가장 뛰어나다고 했던 소설 <구토>, 그리고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완독하고 나면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을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긴다.
김호운 소설가ㆍ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