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황청, 상평청, 선혜청, 진휼청, 혜민원, 의창, 사창…
모두 옛날 복지 관련 기관들이다. 이때의 복지는 임금의 시혜요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똑똑하고 마음 착한 왕은 백성의 가난을 없애주려 노력했지만, 왕들 대부분은 그럴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마음이 없거나 둘 다였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고친다’라는 말처럼 저 제도들로 사회 전반의 가난 문제가 해결된 적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가난은 ‘운명’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서양도 사정은 비슷하다. 종교기관의 구빈책이 가난의 고통을 줄여주는 거의 유일한 대책이었다. 국가 차원의 구빈정책이 시작된 것은 자본주의가 싹트고 도시가 성립하기 시작한 15세기 말부터다.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구빈정책은 노동 중시 정책과 결부돼 가난을 개인의 책임으로, 태만과 게으름의 탓으로 돌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유랑자들을 잡아 강제 노역시키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일을 열심히 해도 벗어날 길 없는 가난이 일반화됐다. 비로소 가난이 개인 탓이 아니라 제도적, 사회적 책임이라는 의식이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현대적 의미의 사회복지와 보장의 바탕이 됐다.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사민당과 노동계의 불만을 가라앉히려고 최초로 현대식 사회보험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민주주의가 익어가 복지국가 단계가 되자 복지는 국가의 의무가 됐고, 국민의 권리가 됐다. 그러나 세계 경제의 지체가 이어지자 이제 복지를 민영화하는 등 다변화, 다양화하는 단계가 됐다.
우리는 지금 복지국가인가? 선진국으로 떠밀린 이상 복지국가가 아니라고 하기는 무엇하지만, 제대로 된 복지국가라 하기에도 애매하다. 이런 상태에서 기본소득이며 보편복지를 지향하는 정책이나 정치가들이 눈에 띄지만 아무래도 한계는 있다. 물론 보편복지 나름의 장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복지를 시혜로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갈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 일은 대체로 무엇이 진리냐 보다 다름의 인정과 포용과 관용과 타협의 문제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개인적 갈등 없는 사회적 갈등 없고, 사회적 문제 결부되지 않는 개인적 문제도 없다. 정부의 사회보장으로 노후가 보장됐으면 좋겠지만, 스스로 하는 대비가 가장 먼저다. 그래서 노후준비는 빠를수록 좋고, 늦었다 싶어도 그 당장 시작해야 한다.
‘재테크’할 돈도 없지만, 그런 재주도 없으니 지출 조정이라도 해야 하겠다. 과소비와 낭비를 줄이면 환경부담도 줄게 되므로 누이 좋고 매부도 좋다. 코로나 핑계로 쉽게 주문하던 배달 음식도 줄여야 한다. 더불어 실현 가능한 운동도 열심히 하면 좋겠다. 개인이 건강해지면 건강보험도 건강해지고, 그러면 국가는 좀 더 여유롭고, 사회는 풍요로워진다. 그러니 잘 걷는 것, 자기 건강 지키는 것 하나가 노후준비고 애국이고 인류애이며 생태주의와 연결된다. 우리는 그렇게 모두 각자, 혼자이지만, 따지고 보면 다 이어져 있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독교육복지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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