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화창경로당 건너편 오솔길을 따라 20m정도만 오르면 현계 박서의 묘소가 있다. 입구 왼쪽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신도비는 조선시대 가선대부(嘉善大夫, 참판급, 현 차관급)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자의 묘소 입구에 세울 수 있는 유서 깊은 문화재로, 본인은 물론 당대의 생생한 역사ㆍ문화적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실록이 정사를 기록하고, 개인이 저술한 사서들이 야사를 중심으로 기록됐다면 신도비는 대개 3~4천자 정도의 분량으로 개인의 출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관직생활 등을 소상하게 기록함으로써 당시의 사실과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요긴한 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신도비는 각 지자체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으나 안양에 현존하는, 유일한 신도비인 현계 박서의 신도비가 도로 절개지 언덕 위에 정자각도 없이 365년 동안 그대로 방치돼 있어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안양의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현계 박서(玄溪 朴?, 1602~1653년)는 조선시대 효종 임금 재위 기간 예조, 공조 및 병조 판서를 역임한 고위 관리다. 효종과 함께 북벌정책을 주도한 병조판서로 재직 중 사망해 안양시 석수동에 묘소가 마련돼 안장됐다. 사후 3년이 지나 현재의 석수동 화창로 길목에 조선시대 종2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자들에게만 허락됐던 신도비가 세워졌다.
이 신도비는 대제학을 지낸 낙정재 조석윤이 비문을 짓고, 대사헌을 역임한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쓰고, 영의정을 지낸 문곡 김수항이 전액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사료되지만 아직 안내 푯말조차 없이 풀밭 속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지정문화재다. 인근 군포지역만 하더라도 병조판서 이기조, 정난종, 안양군, 김만기 등의 신도비가 모두 문화재로 지정돼 잘 보존 관리되고 있다. 의왕지역에도 호조판서 채세영 신도비, 한익모 신도비 등이 문화재로 지정돼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안양지역에는 ‘현계 박서 선생의 신도비’가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으나 방치되고 있으므로 조속히 문화재로 지정,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판서를 지낸 고관이었으나 정작 죽은 후에는 자신의 장례용품조차 없었던 청빈한 관리로도 유명하다.
현계 박서에 관한 또 다른 유명한 일화도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이 모두 그러했듯, 박서는 얼굴도 모르는 규수와 정혼을 했다. 부모의 뜻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정혼한 규수가 병에 걸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당연히 박서의 집안에서는 파혼을 종용했지만 박서는 “어찌 정혼한 신의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라며 혼인을 하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혼인 당일 나타난 신부는 너무나 아리따운 모습이었다. 이 규수를 연모하던 총각이 흘린 소문이 전해졌던 것이다. 신의를 상실해가고 있는 이 시대의 귀감이기도 하다.
김홍석 안양일심교회 당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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