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8도를 밑돌던 지난해 겨울, 포천지역 농가의 한 비닐하우스에서 캄보디아 국적 노동자 속헹(당시 31ㆍ여)이 눈을 감았다. 삶의 끝자락까지 ‘집 아닌 집’에서 병을 앓아야 했던 그의 죽음을 계기로 정부는 뒤늦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열악한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는 반쪽짜리에 불과했고, 한국의 고용허가제는 ‘현대판 노예제’라는 악명을 이어가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바람은 명확하다. 기본권을 보장받는 곳에서 살게 해달라는 것. 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자의 숙소는 구조적 안전과 적절한 수준의 품위, 위생 그리고 편의가 보장돼야 하며 이주노동자에 대해 내국인과 동일한 처우를 보장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부의 대책, ‘현상 유지’에 그쳤다
고용노동부는 올해 1월 농ㆍ어업 분야 이주노동자 주거환경 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사업주가 불법 가설건축물을 숙소로 제공하면 이주노동자를 고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열악한 주거에 처한 이주노동자가 사업장 변경을 원하면, 근로자 귀책 사유없이 노동부에서 직권으로 허용하는 대안도 제시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대로다. 가설건축물을 숙소로 제공하지 못하게 하는 방침은 지난 1월 이후 고용허가를 신청하는 신규 고용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기존 이주노동자는 살던 곳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사업장 변경도 유명무실하다. 다른 농장의 숙소도 처참한 환경은 마찬가지인 탓이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업장을 바꿔 달라고 했다가 농장주의 눈밖에 날까 하는 두려움이다. 한국의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재고용, 재취업 등 모든 권한을 오로지 고용주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용허가제, ‘노동 착취’ 수단으로 전락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를 비전문취업(E-9), 방문취업(H-2) 등 비자로 국내 사업장 취업을 안내하는 제도지만, 실상은 ‘현대판 노예제’라 불릴 만큼 착취를 용인하고 있다.
농장들은 편법을 써서라도 사업장 근로자를 5인 이하로 맞춘다. 이 때문에 해고 제한, 주 52시간 근로 제한, 가산ㆍ연차수당 등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벗어난다. 특히 농업 분야는 근로기준법 제63조에 의해 근로시간, 휴게, 휴일에 관한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 법에 뚫린 구멍은 관리ㆍ감독의 부재로 이어지며, 농장주가 이주노동자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고기복 외국인이주노동자운동협의회 운영위원장은 “고용허가제의 맹점으로 취업 연장을 바라는 이주노동자로선 장시간 노동은 물론 열악한 주거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출할 수 없다”며 “불합리한 제도에 정부의 외면을 더해 노동 착취가 벌어지고 있다”고 질책했다.
■“이주노동자 주거, 정부 움직여야 변화”
윤자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원은 정부의 대책에서 개선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농ㆍ어업 분야 이주노동자의 주거 문제는 오래 전부터 인지됐던 문제로, 그간 정부가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는 설명이다. 윤 연구원은 “이주노동자는 내국인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결국 한국에서 필요로 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며 “열악한 일자리를 채워줄 대상으로만 보는 건 아닌지 반성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고용주에게만 문제 해결을 맡겨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기존의 농ㆍ어촌 시설물을 숙소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윤 연구원은 “가설건축물에서의 삶은 겨울보다 여름이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며 “정부는 폭염으로부터 안전한 숙소를 제공할 수 있도록 관리ㆍ감독할 책임을 방기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장희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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