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정원과 현대미술의 만남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는 개성이 넘치는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중에는 아름드리 굴참나무를 품고 있는 특별한 건축물이 있다. 블루메미술관(Blume Museum of Contemporary Art, BMOCA)의 건물 벽에 뚫린 구멍으로 뻗어나간 가지에 푸른 잎들이 유월의 햇살에 반짝인다. 굴참나무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 쏟은 수고와 비용은 상상을 넘어선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꽃과 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정원이 나타난다. 신선한 상상력과 우아한 풍경을 연출하는 블루메미술관은 건축가 우경국이 디자인한 작품으로 2006년 대한민국 건축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블루메’는 미술관의 상징인 굴참나무의 학명(Quercus variabilis Blume) 마지막 단어에서 딴 것인데 독일어로 꽃을 뜻한다.
특별한 사연과 이야기를 간직한 블루메미술관(관장 백순실)은 나무와 건물이 어울리듯 미술관과 사람들 사이의 소통을 지향하는 주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블루메미술관은 특성화된 주제를 가진 전시로 현대미술의 현장을 해석하고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 만나고 있다. 살아 있는 나무와 정원을 품고 있는 건축의 모습대로 블루메미술관은 생명과 소통, 만남과 관계를 만들어내는 현대미술의 방식에 주목한다. 2013년 봄에 개관한 이후 지금까지 22개의 현대미술전시를 기획해왔다. ‘나무와 만나다’, ‘정원사의 시간’, ‘정원놀이’, ‘재료의 의지-정원에서의 대화’전(展) 등 주제에서 짐작하듯 기획전은 정원과 자연을 테마로 한 것들이 많다.
아이들이 정원에 누워서 꽃을 올려보며 상상력을 펼치는 곳
헤이리 예술마을에 산 지 17년이 된다는 백순실 관장이 이곳에 미술관을 설립한 까닭을 들려준다. “요즘과 달리 20년 전만 해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들, 특히 난해한 현대미술을 전공한 젊은 작가들이 전시할 공간을 빌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같은 길을 걷는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펼치는 장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또 하나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 다음 세대를 소중히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정교육이 부재하고 혼란한 세태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미술관은 열려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느끼도록 돕고 싶었다.”
그의 말처럼 창문 너머는 화초가 무성한 정원이 있다.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이 또한 작품, 설치미술인 셈이다. “정원 이름이 ‘피어나는 초원’이다. 우리는 평소 꽃들을 내려다보지 않나? 여기서는 아이들에게 누워서 정원을 바라보게 한다.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보느냐가 중요하다. 아이들이 자연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블루메미술관은 전시관 못지않게 정원 가꾸기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미술관 안팎에 마련한 정원에는 무려 200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손수 정원을 가꾼다는 백 관장의 말이 인상적이다. “과수원집 딸로 태어난 덕분에 유년 시절부터 풀과 나무와 친숙했다. 그림을 그리고, 클래식을 듣는 것만큼이나 정원을 가꾸는 일이 즐겁다.”
■다향과 선율의 화폭에 담다
서양화가인 백 관장은 90년대에 ‘동다송’ 연작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일찍이 다도에 입문한 인연으로 그가 차의 정신을 노래한 초의선사(1786~1866)의 ‘동다송’을 연작으로 제작했던 것이 현대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당시 그는 “차를 마시듯 날마다 차를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차의 향기와 빛깔, 다도의 정신이 담긴 그의 그림은 향기로운 차처럼 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블루메미술관의 독특한 외벽 장식은 바로 백 관장의 ‘동다송’을 형상화한 것이다. 차를 사랑하듯 클래식을 사랑했다는 백 관장이 사무실 벽에 걸린 추상화를 가리킨다. “제목이 ‘모차르트 제39번’이다.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교향곡을 형상화한 것이다. 음악은 선율이 중요하다. 선율만 잘 타도 그림이 된다.” 선율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선율을 표현하려니 추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나의 영혼까지 실린 음악 그림이길 바라며 작업했다.”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제작 비법을 자분자분 들려준다. 그가 클래식 선율을 회화로 옮기는 작업을 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시인 이인혜의 권유로 음악전문 잡지 ‘월간 피아노’에 연재하던 작품을 엮은 책이 ‘시인이 읽고 화가가 그리는 영혼의 클래식 100’(한길사)과 ‘랩소디 인 블루’(한길사)라는 두 권의 단행본으로 탄생한다. 앞의 책을 소개하는 첫 구절이 “40년간 쉬지 않고 도락(道樂)의 길을 형용해 온 서양화가 백순실”이다. 백 관장의 설명을 들으면 현대미술의 높은 벽도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다. “해답은 그냥 보는 수밖에 없다. 어렵다는 선입견을 버리고 떠오르는 느낌을 따라가며 그냥 즐기면 된다. 내 마음에 드는 색감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하라.”
■“집 밖의 미술관에서 집을 돌아보는 전시” 집에서 집으로
김은영 학예연구실장의 안내로 기획전 “집에서 집으로”를 둘러본다. 5월1일에 개관한 이 기획전은 2021년 포스트 펜데믹 시리즈 두 번째 전시로 기획한 것으로 8월29일까지 이어진다. 민성홍, 박관택, 이창훈, 조재영, 황문정 다섯 명의 현대미술작가와 EUS+ 건축가와 함께 8점의 설치작품을 통해 ‘집의 의미를 돌아보는’ 기획이다. 코로나19 이후 모든 것이 집으로 모이고 있다. 자연과의 관계망 안에서 “집의 본질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를 기획한 김 학예실장의 안내에 귀를 기울인다. “민성홍 작가에게 집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라면, 이창훈 작가에게 집은 고요함 속에 드러나는 기억과 이야기이고, 황문정 작가에게 집은 계속 진동할 수 있는 활기와 움직임이다….”
미술관의 다락 공간에는 세운상가에서 심야책방으로 유명한 독립서점 ‘커넥티드 북스토어’와 어린이 놀이문화 콘텐츠 기관인 ‘키즈캔’이 함께 전시내용을 해석한 책들로 다양한 전시경험을 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집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한 키즈캔의 그림책과 매일 반복되며 매일이 다른 집에서의 ‘요리조리 달걀요리 조리법’ 같은 개성 있는 책을 소개하는 전시도 재미있다.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 ‘꿈꾸는 집’과 가족 교육 프로그램 ‘집으로 가는 길’에도 참여할 수 있다.
■가족들, 큰 나무 밑에서 놀다
블루메박물관은 그동안의 노력을 인정받아 많은 상을 수상했다. 경기도지사 표창 우수미술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박물관 미술관 업무추진 유공 정부포상을 받은 것이다. 지난해에는 ‘치유공간으로서의 박물관’이라는 주제의 국립중앙박물관 교육 심포지엄에 사립미술관으로서는 유일하게 사례를 발표한 미술관으로 선정될 정도로 문화계 안에서도 전문성과 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미술관은 3개의 전시실, 교육실, 야외 정원, 사무실 등 연면적 200평 규모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굴참나무가 훤히 보이는 통유리창과 계단으로 이어진 공간이 시원하다. 다락방 같은 전시실은 아이들 놀이터 같다. 건물 곳곳을 장식한 정원에는 백 관장이 손수 가꾼 200여종의 꽃들이 피고 진다. 매년 봄, 가을에 진행하는 ‘미술관 정원탐사’는 아이들이 식물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려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물놀이와 미술체험을 엮은 ‘미술관 속 여름사냥’, 작품이 탄생해 전시장에 설치되는 과정을 체험하는 ‘빅트리 어린이 워크숍’, 예술 전문가 부모들이 직접 진행하는 공동 육아 프로그램 ‘예술 육아의 날’ 등 특화된 프로그램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연말에는 아이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와 함께 ‘해설이 있는 어린이 음악회’가 열린다. 역량 있는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중진작가를 새롭게 조명하는 사업을 꾸준하게 벌이고 있는 블루메미술관은 다양한 기획과 프로그램으로 적극적인 소통을 시도하여 관객이나 참여자들의 재방문율이 높은 미술관으로 손꼽힌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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