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팬이기는 하나 영화배우 이름이나 그의 사생활 등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한 영화제에서 조연상을 받은 우리나라 배우의 “제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Glenn Close)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겠어요. 오늘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조금 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라는 겸손한 수상소감을 듣자, 몇 년 전 일이 기억났다.
한 학술지의 편집인이 내게 ‘남자 세상에서의 성적 편견’이라는 사설을 하나 써 달라고 요청하며, 아내(The Wife, 2017)라는 영화의 내용을 포함해 달라고 하였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이 바로 글렌 클로즈였기에 기억난 것이다.
조셉 캐슬먼은 유명한 소설가로, 조안(글렌 클로즈)의 헌신적인 내조 덕택에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다. 글재주를 인정받지 못한 남편은 사랑과 가족을 무기로 재능있는 아내를 평생 대필 작가의 굴레에 가두어 마침내 노벨문학상까지 받게 된 것이다. 아내는 자신의 창작물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 명성을 이용한 남편의 바람기까지 인내하고 가족을 위해 평생 희생하고 살았던 것이다.
노벨상 시상식 준비와 연회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부부의 이야기 사이로 그들의 과거가 삽입된다. 당시 조안은 동창회 모임에서 선배 여성작가 엘레인 모젤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엘레인: 대중은 여성작가가 쓴 대담한 글을 견디지 못해. 너는 결코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거야.
조안: 누구의 관심을요?
엘레인: 평론하는 남자들, 출판사를 모으는 남자들, 출판하는 남자들.
조안: 글을 써야 작가지요.
엘레인: 쓴 글이 읽혀야 작가이지.
당시 문학계에 만연한 여성 작가 차별로 인해 여자는 결코 작가로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창작을 시작하지 말라는 선배의 말을 듣고 그녀가 동요하였던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그 사설이 학술지에 게재된 뒤 나는 터키 이즈미르에 있는 한 의과대학의 여자 조교수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그녀는 나의 사설에 매우 공감한다면서 기회가 있으면 공동연구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필자가 의과대학에 다녔던 1970년대 말에는 160명 정원에 여학생이 10명 정도로 그 수가 매우 적었으나, 요사이 가르치는 학급에서는 여학생이 반정도 혹은 그 이상 차지하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 의학계에서의 성적 편견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고 보인다.
수필가로서 시인으로서 이른바 블랙리스트나 화이트리스트 없이 문학성과 예술성에 근거하여 평가받고 기회를 얻게 되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글에 따라 ‘평론하는 사람들, 출판사를 모으는 사람들, 출판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좋은 글은 많이 읽히고 그 글을 쓴 작가는 진정한 ‘작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스토리의 주인공인 글렌 클로즈와 동등하게 후보에 올라 마침내 상을 받은 우리나라 배우 덕분에 더욱 뿌듯한 저녁이다.
황건 인하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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