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영석 이석영(潁石 李石榮·1855-1934)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감춰져 있는 인물이다. 백사 이항복의 11세손이며, 우당 이회영과 성재 이시영 부통령의 둘째 형으로, 무장독립투쟁의 베이스캠프라고 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울 때 건립비용과 운영자금을 쾌척했던 당대 굴지의 재산가였다.
마침 2월16일, 남양주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에서 영석 선생 순국87주기 추모식이 거행됐다. 그 당시 보도에 따르면 1934년 2월16일 상해 빈민가에서 서거해,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동생 이시영은 사정이 있어 항주에 머물러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상주가 없이 장례를 지냈다고 보도했다. 임시정부가 윤봉길 상해의거이후 항주로 피신했고 상해는 일제가 점령하여 독립운동가들은 접근하지 못했다. 의열투쟁 단체 다물단(多勿團) 단장이던 아들 이규준은 전 가족이 일제에 몰살되어, 무후선열(無後先烈)로 안타깝게도 그동안 추모식을 거행하지 못했었다.
이석영 선생은 서울 태생이지만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 대감의 양자로 입양되면서 남양주와 인연을 맺는다. 당시 이유원은 최고의 재산가로,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경기도 양주에게 한양까지 80리인데, 그 주변의 전답이 모두 이유원의 소유 토지”라고 서술했다.
이 재산을 모두 상속받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석영 6형제는 독립운동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비밀리에 매각하여 40만원의 자금을 가지고 망명했다. 1969년 월간지 ‘신동아’에서 한국은행에 의뢰하여 추산한 규모가 600억원이었고, 2012년 한 대학에서 조사한 6형제의 소유재산 가치가 2조원을 넘는 엄청난 재산이었다.
이석영 선생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쾌척한 분이다.
신흥무관학교을 세우는데 밑거름이 되었고, 무관학교 출신들이 해방될 때까지 독립전쟁의 주역이었다. 1940년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 할 때, 지청천 사령관을 비롯한 김원봉, 이범석, 김학규 등 고위 지휘관들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당대 굴지의 재벌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쾌척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업적을 세웠으나 조직적인 독립운동이나 일제강점기에 옥살이하지 않아, 우리 정부에서는 1991년 하위 등급인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여 홀대했다.
다행히 늦게나마 남양주시에서 이석영 선생을 발굴해 ‘이석영 광장’을 조성하고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을 개관하여 독립운동 업적을 기리고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
본래 경기도에는 조선시대 금수저 사대부들이 많이 살았지만 나라가 망할 때 구국전선에 나서는 이들이 드물었다. 이런 와중에 이석영과 그들 형제처럼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쳐 지도자로서 사명을 다한 독립운동가는 없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고, 대한민국의 긍지이며, 우리 경기도민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황원섭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공동대표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