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볼트는 쿠바에 도착하여 흑인 노예무역 실태에 충격을 받고 그는 설득력 있는 묘사를 통하여 노예제도와 그에 따른 ‘인간 본성’에 대한 피해 사실을 유럽에 알린다. 그는 쿠바 자연의 아름다움과 문화를 예찬하고 존경하지만, 스페인 점령군에 의한 사악한 노예제도가 인간 본성을 훼손하였다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인류와 정의의 원칙〉에서 노예제도에 대하여 ‘교육받고 깨우친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그런 모순이 존재할 수 있는지’를 ‘인간의 정의’ 측면에서 이 문제를 유럽 사회에 제기한다.
훔볼트는 낯선 곳에서 눈길이 닿는 창조물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여행을 하고 그가 남아메리카를 찾기 이전에는 이곳이 약탈 대상이 되었으나 그가 찾은 후에는 연구 대상이 된다. 이런 탐험 여행 결과로 페루 앞바다를 북상하는 훔볼트 해류 외에, 산·강·만·대학 등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훔볼트 펭귄’ ‘훔볼트 오징어’처럼 그의 애칭이 붙기도 하였다.
19세기 훔볼트의 남북 아메리카대륙 탐사는 많은 과학적 업적을 남기고 영향도 끼쳤다. 찰스 다윈은 “훔볼트가 없었다면 ‘비글호’를 타지 않았을 것이고 《종의 기원》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한 것을 볼 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면 훔볼트는 아메리카를 발굴하는 성과를 남겼다.
이처럼 자연 과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훔볼트는 《쿠바섬에 관한 정치적 에세이》 이외에도 많은 연구논문과 탐험기록을 남겼고, 19세기 전반의 과학을 다룬 그의 대표작 《코스모스 Kosmos》를 저술하였다. 이런 업적 때문에 그를 자연 지리학 또는 현대 생태학의 창시자라 일컫고, 당시 그를 종합적인 지식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훔볼트는 25년이란 세월 동안 조사하고 연구한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일생의 역작 《코스모스》 전 5권을 저술한다. 이 책은 그의 나이 76세인 1845년에 제1권이 발간되고, 1859년 90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제5권의 반 정도가 완성되었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다. 자연 과학자로서 관찰하고 얻은 지식을 사회과학적 언어로 저술한 그의 노력에 칭찬을 넘어 찬사를 보내야만 한다.
훔볼트는 자연과학적 깨달음을 통하여 얻은 지식이 그릇된 이념적 이데올로기로 변질하여 확산하는 것을 우려하면서 객관적 관념론에 기반한 철학적 사상을 구체화한다. 이런 훔볼트의 학문적 가치를 ‘다윈 이전에 훔볼트가 있었다’라는 평가처럼 그의 역작 《코스모스》도 ‘칼 세이건 이전에 훔볼트가 있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 자연과학의 고전이다.
박태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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