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지난달 20일 국회에 북한은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위임통치를 하고 있다”고 보고해서 파장이 일고 있다. 지난 4월 돌던 ‘김정은 사망설’과 ‘대역설’, ‘건강이상’, ‘리병철 군부쿠데타’ 등 온갖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세습왕조국가 성격의 북한에서 ‘위임통치’란 왕이 친동생한테 ‘양위’를 한 것과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왕조시대에 왕이 세자에게 ‘양위 소동’을 벌이면 피바람이 일어났다. 잘못도 없는 세자를 아들이지만 죽이거나 석고대죄를 해야 왕이 마음을 풀었다.
한편 통일부는 “김 위원장이 당·정·군을 공식적·실질적으로 장악한 상황에서 분야별 ‘역할분담’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북한 소식에 밝은 베이징의 한 서방 외교 소식통은 김 위원장의 최근 국정운영 방식 변화는 ‘위임 통치’가 아니라 ‘내각 통치’에 가깝다고 했다.
북한에서 ‘위임 통치’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김일성은 ‘1인 통치체제’를 확립한 이후 누구에게도 권한을 나눠주지 않았다. 김정일도 혈족이라도 이복형제를 숙청했고 2인자 소리를 듣는 부하는 바로 제거했다. 김정은도 고모부와 이복형을 비롯한 수많은 권력자를 처형하면서 ‘공포정치’를 하고 있다. 그랬던 김정은이 김여정을 비롯한 고위직에 주요 권한을 위임(?) 하고 역할을 분담시키고 있다는 건 놀라운 변화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 북한의 식량난과 경제난이 극에 달한다고 한다. 2년간이나 지속하는 대북제재의 여파에 코로나19로 인한 국경폐쇄에다 수해까지 겹쳤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이어 세계식량계획(WFP)도 북한 주민의 절반인 1천200만명이 고질적인 식량 부족을 겪고 있다며 북한을 ‘신종 코로나 위기국’으로 지목했다.
‘위임통치(?)’를 한다던 김 위원장은 홍수 태풍 피해가 잇따르는 위기상황이 되자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지난달에는 두 차례나 황해북도와 황해남도를 찾아 국무위원장 전략예비물자를 풀도록 했다. 이달 5일에는 태풍 마이삭의 피해를 당한 함경남도 지역에서 유례없는 정무국 확대회의까지 열었다.
지금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기보다 더한 전례 없는 국가재난으로 민심이 흉흉한 위기상황이다. 김 위원장의 절대권력에는 변함이 없으나 건강문제가 언제 불거질지 모른다. 그래서 친동생과 주요 간부에게 담당분야의 정책결정에 대한 일정한 권한을 부여하고 동시에 희생양도 삼을 수 있는 ‘꼼수의 통치술’을 실험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가장 잘 보고 있어야 할 국가정보기관이 ‘위임통치’라는 말로 혼란을 부추기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기호 둘하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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