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안성 조병화문학관

시인의 창작 열정 고스란히 간직한 ‘詩세상’
1993년 문화사랑방으로 지은 문학관, 1층 전시실 시집·수필집 등 저서 보관
편운재, 혜화동 서재 그대로 옮겨 전시… 청와헌, 은퇴후 지은 화실 노년의 공간, 인근에 어머니와 나란히 시인의 무덤

조병화 시인이 인하대학원장을 퇴임한 후에 지은 집으로 주로 집필활동과 휴식을취하던 공간인 청와헌(聽蛙軒)의 모습. 청와헌은 “개구리소리를 듣는다” 란 뜻이다. 윤원규기자
조병화 시인이 인하대학원장을 퇴임한 후에 지은 집으로 주로 집필활동과 휴식을취하던 공간인 청와헌(聽蛙軒)의 모습. 청와헌은 “개구리소리를 듣는다” 란 뜻이다. 윤원규기자

“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하루이틀사흘여름 가고가을 가고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겨울 이 바다에잊어버리자고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하루이틀사흘” 학창시절에 외웠던 시인 조병화(1921~2003)의 ‘추억’이란 시다. ‘추억’처럼 조병화의 시는 쉽고 간결하며 그윽한 울림이 있어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45년에 교직에 발을 들인 조병화는 시인 김기림을 통해 시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해방 직후 격동의 세월, 청년 조병화를 견디게 한 것은 시를 읽고 시를 짓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1949년에 펴낸 처녀시집이 ‘버리고 싶은 유산’이다. 조병화는 “현대시는 난해하다”는 통념을 깨고 평생 쉬운 언어로 독자에게 다가간 시인이었다.

조병화문학관은 안성의 대표적인 시인조병화의 유품 및 창작저작물, 그림을 상설전시하는 문학기념관으로서, 조 시인의 생애와 창작활동을 만날 수 있다. 안성시 양성면에 위치한 조병화 문학관의 모습. 윤원규기자
조병화문학관은 안성의 대표적인 시인조병화의 유품 및 창작저작물, 그림을 상설전시하는 문학기념관으로서, 조 시인의 생애와 창작활동을 만날 수 있다. 안성시 양성면에 위치한 조병화 문학관의 모습. 윤원규기자

■ 아들에게 듣는 시인 조병화

안성과 용인 경계에 있는 45번 국도변에 ‘시와 조병화문화마을’이란 입간판이 서 있다. 오랜 장마에도 고개를 숙인 벼 이삭을 보며 오묘한 계절의 섭리를 생각하며 마을로 들어선다. 조병화 시인의 고향 안성 난실리는 개똥벌레가 초가을 밤을 수놓을 것 같은 외진 시골마을이다. 골목 안에서 만나는 ‘톡톡플러스지역아동센터’도 아이들의 꿈처럼 알록달록 천진하다. 시인의 생가터에 세워진 이곳은 마을 아이들이 문학과 미술교육을 통해 예술을 감성을 일깨우고 소양을 익히는 배움과 체험의 공간이다. 이 건물을 돌아가면 조병화문학관(관장 조진형)이 있다.

조병화문학관은 1993년 조 시인이 대지를 제공하고 국고의 지원을 받아 문화사랑방으로 지어졌다. 제1전시실에는 기획전시물과 그가 남긴 53권의 창작시집, 수필집, 화집 등 160여 권의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윤원규기자
조병화문학관은 1993년 조 시인이 대지를 제공하고 국고의 지원을 받아 문화사랑방으로 지어졌다. 제1전시실에는 기획전시물과 그가 남긴 53권의 창작시집, 수필집, 화집 등 160여 권의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윤원규기자

조진형 관장과 인터뷰 자리에 오정교 학예사와 입주 작가 손현숙 시인도 동석했다. “난 문학과 거리가 멀어요. 일부러 멀리했지요.” 부친의 뜻을 잇는 조 관장의 뜻밖 말씀에 살짝 놀란다. 매년 조병화 시인의 생일인 5월에 열리는 문학 축제 때 ‘편운문학상’을 수상하고 있다. 30회를 맞은 올해의 수상자는 전윤호 시인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김미희 시인이다. 고희를 맞은 시인이 1990년에 사재를 털어 후배 문인들을 격려하고 후원하기 위한 ‘편운문학상’의 제1회 수상자는 조태일 시인이다. 서정적 경향의 시인 조병화와 달리 조태일은 군부독재에 반대하다가 두 차례나 투옥되었던 저항시인이다.

조병화문학관은 1993년 조 시인이 대지를 제공하고 국고의 지원을 받아 문화사랑방으로 지어졌다. 제1전시실에는 기획전시물과 그가 남긴 53권의 창작시집, 수필집, 화집 등 160여 권의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윤원규기자
조병화문학관은 1993년 조 시인이 대지를 제공하고 국고의 지원을 받아 문화사랑방으로 지어졌다. 제1전시실에는 기획전시물과 그가 남긴 53권의 창작시집, 수필집, 화집 등 160여 권의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윤원규기자

“조태일 시인은 아버님이 경희대 국문과 교수 시절의 애제자였지요. 조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조태일시문학관을 세울 때 유족들이 부친을 찾아와 글을 부탁했어요. 노환으로 글씨를 쓰기 어려워 몇 번의 시도 끝에 완성한 것이 ‘조태일은 시인이다’라는 글이지요.” 먼저 간 제자를 추모한 스승의 육필은 곡성 조태일시문학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시인은 어떻게 53권의 시집을 포함해 무려 160권이란 책을 남겼을까. “부친은 남들보다 두 배의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문인들과 어울리다 밤늦게 집에 들어와도 새벽이면 반드시 일어났지요.” 조 관장은 그 비결이 부지런함이라고 단언했다. 손현숙 시인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수영 시인과 특별한 사이셨어요. 인민군에 끌려가 죽은 줄 알았던 김수영 시인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조병화 시인께 편지를 보냈지요. 달려가 김수영 시인이 석방되도록 애쓴 분이 조병화 시인이랍니다.” 조 관장은 편운문학상이 문인들이 선망하는 문학상으로 자리를 잡은 비결(!)도 들려주었다. “수상자들이 후보를 추천하고 수상자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문학관에서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습니다.”

조병화 시인의 묘소. 윤원규기자
조병화 시인의 묘소. 윤원규기자

■ 창작의 공간, 편운재와 청와헌

문학관은 크게 세 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조병화 시인이 대지를 제공하고 국고의 지원을 받아 1993년에 문화사랑방으로 지은 문학관과 시인이 직접 지어 이전부터 사용하던 두 채의 건물 편운재와 청와헌이다. 문학관 1층 전시실에는 시인이 펴낸 시집과 수필집을 비롯한 저서는 물론 ‘갑(甲)’으로 채워진 유년시절의 성적표부터 국가로부터 받은 훈장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80년 생애를 드러내는 유물들로 가득하다. 럭비공과 유니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학 때 선수로 활약했지요. 고교와 대학에 럭비부를 창설하고 코치로 활동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어요.” 육상선수로도 활약했다니 시인은 몸에도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안내를 맡은 오정교 학예사는 조 시인의 시를 여러 편 노래하듯 낭송하며 유물을 설명하더니 귀에 솔깃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준다. “김수영은 일본어로 시를 썼다가 다시 우리말로 번역했는데 조병화는 처음부터 한글로 시를 썼지요.”

조병화와 김수영은 동갑내기 문우로 절친한 사이였다. 강의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에는 사진을 담은 액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놀라웠다. 저 많은 것을 어떻게 간직했을. 2층 세미나실에는 편운문학상 역대 수상자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1회 수상자 조태일을 비롯해 마종기, 정호승, 나태주 같은 시인들은 물론 김세영, 유종호, 임헌영 같은 문학평론가의 얼굴도 보인다.

조각구름 집이란 뜻의 ‘편운재(片雲齋)’는 시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묘막 삼아 1963년에 지은 집이다. 시인의 사적 일상과 한국문단의 역사까지 두루 살필 수 있는 이곳에 시인이 혜화동에 있던 서재를 그대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마주한 ‘청와헌(聽蛙軒)’은 시인이 대학에서 은퇴한 1986년에 지은 화실이다. ‘개구리 소리를 듣는 집’이란 낭만적인 이름의 청와헌에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노년 시인의 모습이 상상됐다. 시인이 그림을 사랑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천경자, 장욱진, 김환기 같은 화가들이 그와 가까웠던 작가들이다. 시인은 개인전시회도 열만큼 그림에도 애정을 쏟았다. 시인은 노년을 청와헌에서 지내며 자신이 아홉 살까지 살았던 고향마을 난실리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나는 청와헌을 지으면서 내 고향 난실리에 버스정거장을 마을 사람들을 위해 지어주었다. 그리고 그 지붕 꼭대기에 ‘꿈’이라는 깃발을 달아주었다. 꿈을 가지고 살자는 의도였었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에게 그 꿈이라는 깃발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이처럼 노년의 시인은 고향의 아이들을 위해 운동장을 마련하고 철봉대와 농구대를 세웠으며, 이웃들이 쉬도록 등나무 넝쿨 휴게소를 지은 다정다감한 이웃 할아버지였다.

효심이 지극했던 조병화 시인은 1962년 어머니인 진종 여사가 별세하자 자신의 호인 ‘편운’을 딴 편운재를 짓고 어머님을 기렸다. 편운재 집필실의 모습. 윤원규기자
효심이 지극했던 조병화 시인은 1962년 어머니인 진종 여사가 별세하자 자신의 호인 ‘편운’을 딴 편운재를 짓고 어머님을 기렸다. 편운재 집필실의 모습. 윤원규기자

■ 나는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에…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 전신)를 졸업한 21세의 조병화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합격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나는 네가 시험에 떨어졌으면 했다”고 고백했을 만큼 아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를 둔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에 영혼의 영생(永生)을 믿는다.”

편운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시인의 무덤이 있다. 어머니와 아내의 묘와 나란히 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던 해에 펴낸 ‘어머니’란 시집으로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 상금으로 어머니 무덤 앞에 시비 ‘해마다 봄이 되면’을 세웠다.

“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어머님 말씀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땅속에서, 땅 위에서공중에서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조병화 시인은 자신의 삶에서 소중히 여겼던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럭비는 나의 청춘, 시는 나의 철학, 그림은 나의 위안, 어머니는 나의 고향, 나의 종교.”

시인이 미리 써 두었던 묘비명은 단 석 줄이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어머님께 돌아왔습니다’ - ‘꿈의 귀향’

조병화 시인은 복 많은 시인으로 불린다. 세계 시인대회에서 계관시인의 호칭도 받았고 대학 부총장, 시인협회 회장, 문인협회이사장, 예술원 회장까지 지냈다. 그뿐인가. 여러 편의 시가 교과서에 오르는 명예도 누렸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하 하지 않은가. 내년이면 시인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김수영 시인도 1921년생이니 두 시인을 조명하는 기획도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안성은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고향이기도 하다. 조병화문학관과 박두진문학관을 함께 순례한다면 풍성한 가을이 될 것 같다. 코로나로 문학관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방문 전에 문학관의 일정을 문의하는 것이 안전하겠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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