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예술인마을로 유명한 헤이리 위치 120여개국 민속악기 등 2천여점 소장
1층 ‘박에서 나온 악기’ 기획전시 눈길, 지하 상설전시관 전세계 악기 한눈에 관람객 직접 연주도 가능 특별한 체험
파주 헤이리를 찾은 날 모처럼 햇살이 비쳤다. 예술인마을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인지 평일인데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적잖다. 갈대광장을 지나 오르막길에 자리한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의 외관은 평범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입구를 지키는 목각인형 한 쌍이 눈길을 끈다. 아프리카 토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시아인이다. 인형이 아니라 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새삼 놀란다. 박물관 초입부터 세계에서 수집한 악기들로 가득하다. 그야말로 ‘악기들 천지’인데 눈에 익숙한 악기를 찾기가 어렵다. 특별한 악기가 보였다. 실로폰처럼 길고 커다란 돌을 연결한 독특한 악기가 눈에 들어온다. 베트남 소수민족이 사용한 ‘돌실로폰’인데, “아예 구할 수 없는 귀중한 유물”이라 고고학계에서도 탐을 낸다고 한다. 박물관을 소개하는 글에 따르면 세계 120여개국의 민속악기를 비롯해 소장 자료가 2천여점이나 된다고 한다. 전시된 민속악기의 많은 것들은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수집해 버린 탓에 “이제는 구하고 싶어도 수집할 수 없는 게 많다”고 한다. 박물관을 열었던 초창기에 일본에서도 찾아와 관심을 가질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세계 악기 사진의 대부분은 세계민속악기박물관에서 제공된 것이다. 국내에 100개 지역 이상의 유물을 갖춘 박물관은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이 유일하고, 아시아를 통틀어도 한국과 일본뿐이라니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 세종의 절대 음감, 다윗의 비파 연주
세종은 박연이 시연하는 편경 소리를 듣고 20분의 1음의 차이를 찾아내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였다. 종묘제례에 사용할 곡을 직접 작곡하고 ‘정간보’라는 악보를 창안했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한 왕이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을 소개하는 글에 세종을 끌어들인 까닭은 다름이 아니다. 한국인들이 음악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거문고 연주는 기본이었다. 이런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2천500년 전의 위대한 교육자 공자도 틈만 나면 악기를 연주하고 연주를 즐겨들었던 음악애호가였다. 공자보다 더 오래 전의 인물인 이스라엘의 왕 다윗도 비파 연주의 고수였다. ‘시편’에 다윗이 지은 노래 여러 편이 실려 있다. 성서는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며 그 노래를 불렀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처럼 옛사람들이 악기 연주를 즐긴 사실은 시대와 지역과 성별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유럽을 제외하면 가까운 이웃나라의 음악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 사람들도 음악을 가까이하고 악기 연주를 즐기는 것은 한국인이나 유럽인들에 못지않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에 들어서면 단단하게 굳어버린 우리의 고정 관념을 깨트리는 유물을 만나게 된다.
■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세계의 민속악기
1층에는 ‘박에서 나온 악기’라는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체험교육을 진행하는 시간과 겹쳐 분주한 김연주 학예사의 안내를 받으니 “그게 그것 같았던” 유물들이 비로소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을 사용해 이처럼 다양한 악기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볼론’은 말리나 기니의 만데족 악기인데 큰 박을 공명통으로 사용한 하프로서 전쟁 전 전사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거나 사냥 의식에서 연주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잠비아에서 제작한 마찰북은 생김새만큼이나 연주법도 특이하다. “박통 안에 박혀 있는 막대를 젖은 손이나 헝겊, 가죽으로 문지르면 마찰음이 가죽면을 진동시켜 소리가 나온다. …연주 방법이 성행위를 연상시켜서 성인식에 사용하기도 했다”
상설전시관은 지하인데, 계단을 내려가자 악기 소리로 요란하다. 나라와 대륙, 문화권별로 악기를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으니 차분히 둘러볼 일이다. 세계 여러 민족과 부족들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닌 이 민속 악기들은 문화재급 가치가 있다. 이처럼 귀중한 악기를 관람객이 만져보고 연주할 수 있도록 허용한 박물관의 결정이 놀랍다.
세계민속박물관의 특징이자 자랑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세계의 악기를 볼 수 있고, 전시된 귀중한 악기를 두드리거나 현을 퉁겨서 소리를 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악기 연주가 신나는 것은 나이 불문이다. 신나게 악기를 두드리는 아이 곁에서 함지박처럼 생긴 악기를 두드리며 귀 기울이는 엄마의 표정이 환하다. 악기의 연원이 된 악기들을 아이와 함께 추적해보면 관람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중국의 산시엔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미센이 되었고, 한국의 해금이 터키와 몽골을 발원지로 하는 후칭이라는 악기에서 유래했다. 이처럼 악기를 비교하며 살피는 일만으로도 문화의 역동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다.
■ 지구촌 모든 음악은 위대하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2003년에 개관한 이후 해마다 다양한 강좌와 교육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의 음악문화를 소개해 왔다. 세계의 민속악기에 대한 지식을 널리 전하기 위해 국립민속박물관과 함께 ‘찾아가는 박물관’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전국 100여 곳의 학교를 찾아 외국에는 이런 악기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연주법을 알려주는 박물관 체험 교육이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풍부한 유물과 함께 음반, 도서 등 관련 학술 자료를 다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악기 전시와 체험에서 더 나아가 박물관에서 구축한 자료를 잘 정리하여 다음 세대에 계승하는 것을 박물관의 임무로 삼기 때문이다.
이영진 관장의 철학에 따라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악기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과 악기의 역사를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악기 유물과 관련된 자료를 꾸준히 확보하고 전문연구자를 키우는 일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그동안 세계의 민속 악기를 연구하여 네 권의 도서를 출판한 사실은 박물관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악기박물관으로의 여행(2009, 현암사)’, ‘인류의 문화유산 악기로의 여행(2010, 음악세계)’, ‘세계 민속악기 탄생설화(2013, 음악세계)’, ‘인간과 악기(2016, 모노폴리)’라는 책이다. 이 책들을 기억했다가 서점에서 구입하거나 도서관에서 대출해 박물관을 관람하기 전에 일독하면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신비롭고 재미난 악기 이야기
‘세계 민속악기 탄생설화’를 펼쳐보면 세상의 모든 악기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악기 끝부분이 말머리 모양을 한 몽골 악기 ‘마두금’으로 연주한 전통 음악은 2008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고 한다. 마두금이 간직한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몽골 유목민이 기르는 낙타 중에는 가끔 새끼를 돌보지 않는 어미 낙타가 있다는데 이런 문제적 낙타 곁에서 마두금을 연주하면 신기하게도 어미 낙타가 마음을 바꿔 새끼를 돌본다고 한다. 말 못하는 동물에게도 통하는 언어가 음악이다. 옛사람들은 전지전능한 신의 마음도 음악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일까 현대에도 종교음악은 세상에 널리 퍼져있다. 악기 연주로 신과 자연을 움직이고 사람을 위로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사실을 박물관에 전시된 수많은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악기를 만든 재료는 너무나 다양하다. 조개껍데기, 뱀 가죽, 고양이 가죽, 심지어 사람의 무릎뼈도 사용했다. 조상숭배나 종교의식에 사용했던 악기는 예술품이나 다름없이 아름답고 정교하다.
■ 악기로 고정관념 깨고 열린 세계로
박물관을 나서며 문득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떠올렸다. 불면 근심 걱정을 사라지게 했다는 신라의 보물 피리 만파식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세계민속악기박물관에서 펴낸 책에도 소개돼 있다. 코로나19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시절 탓이겠다. 코로나19는 이제까지 옳다고 생각했던 상식들이 사실은 편견이거나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세계민속악기박물관은 우리도 이제 고정관념을 버리고 열린 생각, 열린 눈으로 새롭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라고 권한다. 이영진 관장이 전하는 말이 귀에 아직도 쟁쟁하다.
“한국만 세계 대표적인 민족이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도 훌륭한 음악을 갖고 있지요. 다른 민족들도 훌륭한 민족음악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서양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김준영(다사리행복학교 행복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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