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깨운 실학··· 나라와 백성이 잘사는 세상을 꿈꾸다
‘실학’의 중심지는 경기도다. 경기지역 학자를 중심으로 발생한 실학은 경기도에 수많은 유적과 이야기를 남겼다. 실학이 경기도를 대표하는 인문학임을 인식한 경기도는 실학정신을 드높이기 위해 2003년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실학현양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 실학을 널리 알리기 위한 ‘실학축전’을 열었다. 이때 실학을 연구하고 실학정신을 보급하는 중심기관으로 실학박물관 건립을 추진해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고향인 남양주에 박물관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4년여의 공사 기간을 거쳐 2009년 10월에 개관한 실학박물관은 지난해 10주년을 맞았다.
■ 다시 실학정신을 생각하다
실학박물관은 기획전시실(1층)과 상설전시실(2층)이 있다. 실학의 전모를 살필 수 있는 상설전시실은 3개의 테마로 구성돼 있다. 제1전시실에는 ‘실학의 형성’이라는 주제로 꾸며졌는데 서양문물이 전래된 배경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심화된 조선사회의 모순과 개혁, 변화의 과정을 친절히 소개하고 있다. ‘실학의 전개’라는 주제로 꾸며진 제2전시실은 실학사상의 다양한 면모들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조선사회의 핵심 문제는 토지와 신분제였다. 소수의 양반이 독점하고 있던 토지와 점점 늘어나는 노비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초래했다. 토지를 몰수해서 공평하게 재분배하고 노비제 폐지를 주장했다. 유형원의 생각은 요즘 논의되고 있는 ‘기본복지’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실학은 실학자의 삶과 생각을 만나는 일이다.
제3전시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좋아하는 공간이다. 조선시대 천문과 지리를 소개하며 하늘의 별자리를 그려 넣은 천문도와 조선지도, 세계지도를 볼 수 있다. 아울러 성호 이익,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영재 유득공,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같은 유명한 실학자들의 저서와 초상화, 천문 도구를 살펴볼 수 있다.
‘의산문답’을 통해 우리가 세계의 중심임을 선언한 담헌 홍대용이나 ‘북학의’를 통해 부강한 조선의 청사진을 그렸던 초정 박제가 같은 실학자를 만나는 일도 즐겁다. 홍대용이 거문고 연주의 명수이고 수학을 즐겼으며 자신의 집에 천체관측소를 세워 별자리를 관측했다는 사실까지 알면 흥미가 더해진다. 여기에 어머니를 위해 북경을 여행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한글로 정리해 어머니에게 바친 홍대용의 마음을 읽는다면 더욱 실학자가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홍대용, 박지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백탑파의 우정도 조선 후기실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한 장의 지도는 최고의 과학지식과 기술력을 가늠할 수 있는 유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앞에서 경의를 표해야 한다. 1402년 조선에서 제작된 역사상 최초의 세계지도를 임진왜란 때 약탈당한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그래도 600년 전에 아프리카를 인지하고 세계 최초로 지도 속에 그려넣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선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현종 대에 탁월한 기술자이자 과학자 송이영이 제작한 혼천시계의 아름다운 외관과 첨단의 성능이 놀랍다.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기 100여년 전에 정상기, 정항령 부자가 ‘동국지도’라는 탁월한 지도를 제작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상기, 정항령은 지도제작을 가업으로 전승한 멋진 부자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처럼 탁월한 상상력과 빼어난 기술이 왜 전승되지 못했을까.
■ 실학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실학은 여전히 살아있는 학문이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옛사람들이고 그들이 남긴 책은 한문으로 이뤄져 있으니 쉽게 다가서기가 어렵다. 실학박물관은 이러한 장벽을 허무는 일에 적극 나서고 있다. 박물관은 ‘여전히 유효한 실학’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전달하기 위해 궁리하고 있다. 실학박물관 김태희 관장은 ‘생활 속의 실학’과 ‘경기 너머 실학’이라는 두 가지를 실학박물관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으로 제시한다. ‘생활 속의 실학’은 조선시대 실학을 현재의 우리 생활 속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즉 일상생활에서 글쓰기, 여행, 음식 같은 친숙한 주제들에 실학자들이 했던 당대의 고민을 연결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일상에 실학을 더하면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행이라는 주제에 정약용을 더해 ‘정약용의 여행’이라는 콘텐츠를 만들면 조금 더 친근해질 수 있다. 정약용이 당대에 했던 고민을 여행기처럼 풀어나가는 것이다.”
‘경기 너머 실학’은 전국에 있는 실학 관련 자원을 적극 활용하자는 것이다. 실학의 현재화, 생활화를 위한 박물관의 노력은 확장되고 있다. “전시물을 감상하고 강의만 듣는 게 아니라 박물관 일대를 둘러보고, 교육과 연결하는 방식이다. 박물관 관람객 자체가 인근에 놀러 왔다 방문하는 사람이 많아 이런 방식의 교육이 이뤄져야 효율적이다. 남양주를 근거지로 지역 주민과 학교, 문화단체와 함께 박물관이 복합문화공간이 될 수 있도록 꾸려나가고 싶다.”
이처럼 관람객에게 다가가기 위한 실학박물관의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실학박물관의 상징이 하늘과 땅 사이에 수레바퀴가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수레바퀴는 18세기 실학이 추구한 생산과 문명의식을 의미하는데 실학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미래를 열어가고자 하는 실학박물관의 건립취지가 담겨 있다.
■ 수원화성박물관과 공동기획전 ‘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하다’
조선 정조의 개혁 정치를 도운 번암 채제공(1720~1799년)의 삶과 업적을 되돌아보는 특별전 ‘재상 채제공, 실학과 함께하다’가 수원화성박물관 공동기획으로 열리고 있다. 실학박물관에서 다음달 23일까지 전시하니 아직 관람하지 못한 이들은 서두를 일이다. 9월3일부터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전시된다.
보물로 지정된 채제공의 초상을 비롯해 30여점의 유물과 3점의 전시 영상을 통해 정치의 장에서 실학정신을 펼쳐나간 채제공의 역동적인 삶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는 ‘채제공의 출신 배경과 재상으로서 행적’, ‘채제공의 실학 관련성’, ‘시대 변화를 읽은 뛰어난 관료로서 활동’, ‘채제공 초상과 문집’ 등 4부로 구성됐다.
채제공은 국가개혁을 위해 대안을 제시한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의 학문을 계승했고, 성호 이익의 학문을 후배들에게 권면했던 정치가로 실학적 역량을 가진 인물이다. 널리 알려진 채제공의 공적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의전 등이 점유한 특권적 상업 독점권을 폐지하는 조치였다. 채제공은 실패를 거듭했던 통공책을 실현했고, 영세소민의 삶을 보호해 줬다. 서울의 상업 활성화에 기여한 신해통공의 단행은 실학적 관료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정책이다. 채제공이 신도시 수원화성의 건설을 총괄했던 사실은 그에 대한 정조의 기대와 믿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2폭의 ‘수원화성도’ 병풍을 통해 상업 물류의 중심으로 부상했던 조선 최고의 신도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관람의 재미를 더해준다. 채제공의 특별한 초상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전시된 초상화 밑그림을 통해 동양 삼국 중 가장 빼어났던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에 관한 특별한 기술을 확인할 수 있다.
■ 교과서 속 실학이 재미난 동영상으로
실학박물관은 ‘실학’을 오늘 여기에서 느끼고 생각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실학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동영상도 이런 문제의식으로 만들어졌다. 8분의 짧은 영상이지만 실학자들의 학문적 결실과 개혁안을 인상 깊게 보여준다. 장래세대의 주역인 어린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다.
“지식보다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실학박물관을 만들겠다”는 김태희 관장은 대중화를 선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온라인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3분짜리의 동영상으로 실학의 주제를 문답식으로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실학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 유튜브에 실학박물관을 검색해 동영상물을 몇 개 시청하면 실학에 대한 기존의 관념이 바뀔 것이다. 실학박물관은 한강의 너른 품처럼 생각의 크기를 키우는 박물관으로 성장하고 있다.
관람을 마쳤다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 ‘여유당’을 둘러보고 생가 뒤편 동산에 있는 묘소를 참배하면서 글쓰기를 비롯한 다산의 공부법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경치가 뛰어나 머리를 식히고 새로운 계획을 설계하는데 그만이다.
혁명적인 주장으로 가득한 ‘반계수록’의 저자 유형원은 우리 시대에 자주 호출해야 할 매력적인 인물이다. 올 가을에 실학박물관에서 반계 유형원 특별전을 준비하고 있다니 기억할 일이다. 우선 고위관료로서 정조를 보좌하며 조선을 개혁한 번암 채제공부터 만나자.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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