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쏟아지는 북한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면 한반도 문제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이해할 만하다. 먼저 존 볼턴 전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은 그 선정적인 내용만큼 반응도 뜨거웠다. 정치 스캔들을 다루는 주간지에나 어울릴 것 같은 선정적인 표현으로 미국 정치의 속살을 보게 해줬다. 회고록 내용은 상당히 편향적이고 왜곡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우리에게 무척 고마운 선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한반도 문제의 주요 등장인물들 역할과 속마음을 여실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회고록에서 언급되듯 볼턴과 일본 아베 총리는 중요한 고비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북미협상 타결을 방해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앞으로 한국 정부에서 외교ㆍ안보 분야를 담당하게 될 책임자는 최소한 그들보다 몇 배는 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은 물론이고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없다면 이 난관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북한 입장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북한은 문제가 잘 풀리지 않을 때만 도움을 요청하고 때때로 우리 정부를 배제하려 했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협상 실패로 북한은 큰 충격을 받았는데, 남한이 제안했던 영변 핵 폐기 카드를 가지고 협상에 임했기 때문에 원망이 더욱 컸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노력은 실제로 북미 간 의견 차이를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비록 북한이 섭섭하게 느낀 점이 있을지라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상대는 바로 남한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얼마 전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발표한 담화문을 보면 북한의 속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하노이 북미회담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에는 우리가 거래조건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제재의 사슬을 끊고 하루라도 빨리 우리 인민들의 생활향상을 도모해보자고 일대 모험을 하던 시기였다”고 언급한 대목이 있다. 우리 정부가 제시한 ‘한반도 비핵화와 남북 공동번영’의 비전에 북한도 상당히 호응했다고 보인다. 그래서 협상타결로 마무리되지 못한 것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당시엔 남북한 모두 플랜 B가 없었다. 사실 그동안 북미협상 실패에 대비한 대안을 준비하지 못한 근본적 이유는 미국이 합의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시하는 방향을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동맹 관계에 금이 갈 것이라는 거짓 공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동의하는 것과 반대하는 것 사이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한다.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지를 찾아 상대방을 설득하고 협상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국가 간 행위로서 이 때문에 한미동맹이 손상될 수는 없다.
지금 북한은 미국이 먼저 태도를 바꾸라는 입장이며, 대선을 앞둔 미국은 파격적 제안을 할 가능성이 작다. 그러나 마냥 기다린다고 저절로 기회가 조성되진 않는다. 미국 차기 정부가 우호적이라는 보장도 없고 외교·안보 전략을 정비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오히려 바로 지금이 우리 정부가 나서야 할 시점이다. 경제제재가 해제되기 전이라도 남북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북미관계 개선을 전제로 하는 해법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남북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먼저 한걸음이라도 떼려고 노력할 때 북한과 미국도 우리를 존중해 줄 것이다.
민경태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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