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이 살아 숨쉰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미술가 백남준의 작품이 있는 ‘백남준아트센터’. 작가의 이름을 그대로 지은 미술관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지만 우리 땅에서는 백남준이 처음일 것이다. 그만큼 백남준이란 작가는 현대 미술사에 빛나는 존재였다. 천재 음악가에서 천재 전위 설치 예술가로 삶을 바꾼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은 백남준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100년을 앞서는 작품이 아니라 1천년의 시대를 앞서는 작품이었다. 그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이용한 기이한 작품들은 단순한 설치예술품이 아닌 권위와 폭력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민주주의와 인권 진보의 상징이기도 했다. 2001년 경기도는 ‘백남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백남준을 통해 경기도 문화의 혁신적인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경기도가 단순히 대한민국의 경기도가 아닌 세계 수준의 문화 지역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 ‘백남준 프로젝트’의 목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한 ‘백남준 프로젝트’는 어언 20년이 되었다. 2006년에 작고한 백남준과 직접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3명의 경기도지사를 거치면서 작품구매와 건축설계 공모를 통한 뮤지엄의 하드웨어 구축을 통해 2008년 개관하였고 그 후로도 2명의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벌써 12년이 지났다. 백남준이 그토록 염원했던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은 어떤 모습일까?
■ 생전에 전시품 확보… 건축설계 UIA공인 국제현상공모
‘백남준아트센터’는 공공 프로젝트로서는 국내외에서 보기 드물게 사업 구상을 진행한 주체들이 뮤지엄 건립부터 운영까지 지속하게 된 프로젝트다. 경기도가 경기문화재단에 위탁을 주며 진행하게 된 이 프로젝트는 2001년부터 백남준과 3차례에 걸쳐 체결된 양해각서를 통해 작품을 확보하게 되었고, 백남준의 최종 선택을 통해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에 뮤지엄의 부지가 선정되었다. ‘수원 백씨’라는 프리미엄으로 경기도에 ‘(당시)백남준미술관’을 유치하게 되었다는 말이 돌 정도로 백남준은 당시 사업담당자들의 열정에 반해 ‘백남준’이라는 명칭을 가진 최초의 미술관을 경기도에 확정하게 된 것이다. 당시 백남준 프로젝트를 추진한 고(故) 최춘일은 백남준과 그의 동료에게 감동을 주었고, 오늘의 ‘백남준아트센터’를 존재하게 하였다. 그의 작품들이 하나하나 이렇게 백남준 살아생전 작가와의 개별 계약을 통해 진품들을 소장품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미디어 아트 작품의 원천 소스인 비디오 아카이브를 확보하여 뉴욕 작업 스튜디오 벽체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작품들을 기반으로 2003년 건축설계에 있어 당시 국내에서는 거의 처음 이뤄진 UIA공인 국제현상 설계공모를 진행하여 신예 건축가였던 ‘크리스텐 셰멜(Kirsten Shemel)’의 매트릭스(The Matrix)가 선정되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백남준에게 새로운 의지를 불타오르게 하였으며 ‘백남준아트센터’에 많은 기대를 보여주었다. 2006년 시작되어 2008년 준공된 건축물은 위에서 보면 백남준의 이니셜인 ‘P’자 형태로 드러나는 유리 건물로 그랜드 피아노 형태를 보여주기도 하고 건물 안과 밖의 흐름을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 인적구성과 아카이브
2008년 개관 당시 해외 큐레이터를 정식 직원으로 채용하며 화제를 모았던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뮤지엄의 기본 구성요소인 소장품 수집 및 관리, 연구, 전시, 교육 등을 위한 인력뿐만 아니라 비디오 아카이브 연구를 위한 전문적인 ‘아키비스트’와 함께 모든 작품을 손수 유지관리 할 수 있는 ‘테크니션’ 또한 뮤지엄의 전문 인력으로 채용하고 있다. 현재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개관 당시 확보하였던 백남준의 비디오 아카이브를 모두 디지털로 전환하여 보관하고 있으며 아카이브 리서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남준아트센터의 홈페이지에서는 아카이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백남준 아카이브는 백남준과 함께 작업했던 동료 작가, 지인, 컬렉터들이 생성하고 수집한 원자료 컬렉션들로, 백남준의 전시 및 일상과 관련한 서신, 사진, 오브제 등을 포함하며 백남준아트센터 데이터베이스(db.njpartcenter.kr)를 통해 검색할 수 있다.
비디오 아카이브는 백남준이 작업해 왔던 비디오 작품 및 작업 소스, 퍼포먼스 기록 영상, 다큐멘터리 및 영화 등으로 이루어진 아날로그 비디오 2천285점으로, 비디오 아카이브 컬렉션에는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 Good Morning Mr. Orwell>, <글로벌 그루브 Global Groove>, <과달카날 레퀴엠 Guadalcanal Requiem>등이 포함되어 있다.
스튜디오 아카이브는 백남준의 작업실로 이루어진 아카이브 컬렉션으로 백남준이 작업실로 사용하던 뉴욕의 브룸 스트리트에 위치한 스튜디오의 사물과 문서 전부를 이관한 <메모라빌리아>와 그랜드 스트리트에 위치했던 스튜디오의 문서로 구성된 그랜드 스트리스 컬렉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 뮤지엄의 공간 구성과 대중 프로그램
지하 2층과 지상 3층으로 구성된 백남준아트센터는 1층과 2층이 전시공간과 함께 대중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층의 전시공간은
이밖에 다양한 아트상품을 판매하는 뮤지엄 샵은 건물 입구인 1층에 있으며, 건물의 안과 밖을 이용해 활용할 수 있는 카페는 1.5층에 자리 잡고 있어 아트센터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NJP 살롱으로 6년간 운영되어 온 교육프로그램은 최근 현대미술과 미디어를 보여주는 것과 백남준에 대한 것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진화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백남준의 전시’, ‘백남준의 퍼포먼스’, ‘백남준의 ***’로 표현될 백남준에 대한 개론적인 프로그램은 인간 백남준과 작가 백남준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코로나 시대 비대면 전시 기획
코로나19 상황으로 뮤지엄들이 문은 닫은 지 어언 4개월이 넘었다. 공공기관들의 공공성과 함께 코로나19 확산 방지 차원의 부대낌은 비단 뮤지엄 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간 협의해 온 결과물들이 대중들에게 보여줄 기회가 없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작가들과의 약속, 국제적인 협력 등에도 빨간 불이 들어온 지 오래다.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일찌감치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4월 6일 유튜브에 큐레이터가 해설하는 기획전시를 오픈하여 비대면의 만남을 모색하고 있다. ‘미디어 아트’ 창시자인 백남준의 정신을 이어받은 백남준아트센터의 향후 활동이 궁금해진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백남준이 그토록 염원했던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의 앞의 10년은 그의 정신이 오래 살 수 있는 건축물과 구성물을 완성하는 과정이었고 이후 10년은 동시대의 작가들과 함께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걸음을 걸어온 시간이 아닐까 싶다.
■ 세계인이 찾을 백남준의 집
백남준은 자신이 작품이 전시되는 뮤지엄이 만들어지면 그 도시는 풍요의 도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전 세계의 문화인들이 백남준을 소리 높여 외쳤기에 그는 자신이 죽은 이후 백남준 아트센터를 보기 위해 세계의 모든 이들이 용인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미술관 이상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서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용인의 백남준 아트센터가 세계 곳곳의 관람객의 발길이 멈추지 않고, 이로 인하여 용인과 수원 그리고 경기남부 지역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염원과는 달리 ‘백남준아트센터’는 엄청난 콘텐츠를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그리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20년의 경험과 기반을 바탕으로 ‘백남준아트센터’를 세계에 적극 홍보하고 국제적인 설치예술작품 비엔날레를 개최한다면 정말 백남준이 생각한 대로 세계적인 뮤지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육사가 ‘광야’에서 이야기하듯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백남준 아트센터를 찾아와 기쁨의 노래를 목 놓아 부를 것이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