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남북 정상이 합의한 4ㆍ27 판문점 선언. 그 결실로 탄생했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북한이 일방적으로 폭파했다. 게다가 최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쏟아내는 무례한 담화는 우리의 분노를 사고 있다. 북한의 잘못을 열거하자면 이 지면을 다 채워도 부족하다. 하지만 북한 비판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부터는 냉정하게 무엇이 문제였는지 되돌아보고자 한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쉬운 일이 북한 비난인데, 북한학자로서 쉬운 길로 가기보다는 필요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북한은 왜 이렇게 과격한 반응을 보일까. 일차적 원인은 전단 살포 문제인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모든 적대 행위를 중지하기로 약속한 남북합의를 우리가 지키지 못한 것은 큰 오점이다. 그밖에 북미관계가 교착된 상태에서 남한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별로 없다고 판단하고 대미협상 레버리지를 위해 긴장을 조장한다는 해석, 그리고 경제난으로 주민 불만이 높아져서 북한 내부를 단속하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이런 식의 분노 표출은 북한 내부 상황이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매우 과격한 방식으로 SOS 신호를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북한 경제는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다. 무역의 95%를 중국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대북제재 강화로 석탄·철광석·수산물 등 주요수출품목이 금지되고, 최근엔 코로나19 때문에 밀무역마저도 거의 중단됐다. 2020년 대중수출 전망은 2015년 대비 10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무역수지 적자로 외화 잔고가 바닥나서 생필품 수입이 중단되고 물가가 폭등하면 체제가 위협받을 수 있다.
한때 북한은 큰 변화를 모색하기도 했다. 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이 능라도 5ㆍ1 경기장에서 15만 명의 평양 주민들에게 ‘한반도 비핵화’를 언급한 것은 과거엔 상상할 수 없었던 파격이었다. 우리가 제시한 남북 공동번영의 비전을 북한이 믿고 응해준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기대를 저버리는 실망스러운 결과만 이어졌다. 단적인 예로 2018년 말 독감치료제인 타미플루 지원에 남북이 합의했으나, 미국과 유엔사가 대북제재 저촉을 문제 삼아 승인이 계속 지연되다가 결국엔 지원이 무산되기도 했다. 북한에 트라우마를 남겨준 결정적 사건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협상 실패였는데, 이를 계기로 남한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고 원망이 고조됐다.
이후 북한은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관광 사업에 모든 노력을 쏟았다. 관광단지 개발현장에 김정은 위원장이 여러 차례 현지지도를 나가면서 독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코로나19로 헛수고가 되면서 북한 정권의 지도력이 손상되는 위기를 맞았다. 반면 남한은 성공적인 코로나19 대처로 국제사회의 위상이 높아지고 G11 정상회의에 초대됐다. 자신들의 절박한 입장을 남한이 외면한다고 생각한 북한은 이제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을 느끼는 듯하다.
남북한 모두 서로에게 분노가 있지만 이제 그 악순환을 중단해야 한다. 정부 대처가 굴종적이라고 비난함으로써 남북 간 기 싸움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 이 상황을 냉정하게 관리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보자. 만약 정부가 잘못하거나 실행력이 떨어지면 국민이 나서서 강하게 질책할 필요도 있다. 국민의 뜻을 모아 오히려 대외협상력을 높이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강대국 사이에 끼여서 한반도 평화를 향한 어려운 길을 열어가는 우리 정부, 이제 진용을 가다듬고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도록 국민이 힘을 실어줘야 한다.
민경태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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