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 초점 맞추니… 북녘땅이 내 앞으로
2008년 개관한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의 ‘문화·안보관광’ 공간
이산가족 恨 달래는 통일염원소엔 관람객 소망 달린 디지털나무
2층 전망대선 개성 송악산ㆍ北 주민들 생생한 모습까지 한 눈에
인천 강화 이야기에 앞서 북한의 개성에 있는 송악산(松嶽山ㆍ488m)을 소개하고 싶다. 송악산은 산 전체가 주로 화강암인 큰 바위산이다.
예로부터 ‘경기(京畿)의 오악(五嶽)’ 중 한 산으로, 명산 반열에 올라 있다. 경기오악은 송악산을 위시, 가평의 화악산(華嶽山ㆍ1.4㎞)과 가평~포천의 운악산(雲嶽山ㆍ935m) 그리고 파주의 감악산(甘嶽山ㆍ675m)과 과천~서울의 관악산(冠嶽山:631m)으로 모든 산 이름에는 악(嶽)자가 들어 가 있다. 원래 산 이름에서의 악(嶽)자는 ‘큰 산’, ‘위엄있는 산’이란 뜻이였다는데 언제부터인가 ‘바위산’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이들 다섯 산 중 송악산은 남북분단으로 가 볼 수 없는 산이지만, 아주 가까운 위치의 산으로, 강화평화전망대에서는 강 건너 바로 눈 앞으로 다가 선다.
송악산 자락에 펼쳐진 대도시 개성 역시 아무나 가 볼 수 없는 곳이지만 거리로는 아주 가깝다. 남북 분단 이전, 일제 때의 개성~서울 간은 통학기차로 통학을 하던 거리였다. 거리상으로는 약 60km, 철길위의 정거장마다 열차가 정차했기 때문에 기차 타는 시간이 편도로 2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문교부장관을 역임하신 민관식(1918~2006) 선생은 이 통학열차를 이용했던 일정때의 기록을 남겼다. 개성역을 출발, 봉동~장단~문산~금촌~일산~수색~신촌역을 거쳐 서울역(당시의 경성역)에 도착한 다음, 도로위를 달리는 전차로 갈아 타고 안국동으로 이동했다. 그 다음, 도보로 화동(종로구 북촌로)에 있었던 경기고등학교(당시의 경성제일고보)까지 갔다는 것이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어떤 ‘명분’이든 ‘이제 전쟁은 그만’
어느 집단이나 나라, 시대마다 전쟁의 명분들은 다 달랐겠지만, 그 명분들의 공통분모들을 찾다 보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322년)가 말한 “우리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전쟁을 치른다”는 ‘평화’로 귀결되기도 한다.
온갖 전쟁으로 얼룩진 세계사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 역시, 전쟁으로 이어진 역사라는 표현은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이 땅에서 900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의 역사는 전쟁을 통해서 형성되고 발전되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를 가하고 상대를 죽이고 자신들도 상대에게 죽임을 당하는 처참한 전쟁의 비극을 통하여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고 또 성장해 오기도 했다는 사실은 매우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서면 민통선북방지역 제적봉에는 강화평화전망대가 있다.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문화관광공간이다. 2008년 9월 5일에 개관한 이 전망대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인 1층에는 통일염원소를 배치해 놓았다. 이산가족들의 한을 달래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디지털나무를 설치, 탐승객들이 이곳에다 소망을 적고 그 뜻을 오랫도록 기릴 수 있게 해 놓았다.
▲고향 그리워 울고 또 울었던 망향의 긴 세월…남북을 가르는 강안(江岸)의 최단 거리는 고작 1.8km
전망대 본관건물 2층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고성능 망원경으로 북한땅과 북한 주민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조망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가 투영된 한반도의 축소판과 같은 강화의 전쟁사와 군사유적지, 6?25전쟁의 피해 상황도 볼 수 있다. 남북분단의 과정을 설명 받고, 영상물 관람을 통하여 대치중인 남북한 상황도 알 수 있게 해 준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통일로 가는 길을 보게 되며 통일을 위한 노력과 통일 이후의 비전도 제시해 주고 있다.
3층은 북한땅 조망실이다. 조망대에서 조망되는 북한지형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전망대에서 한 눈으로 들어오는 강 건너편 북한의 개풍군 해창리와 삼달리까지는 2.3km, 정말 지척의 거리다. 남북간의 강안(江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강화도 북단의 도로, 전망대로(길)의 한 강안 맞은 편에 있는 북한의 해장포다. 1.8km의 거리다.
▲대룡시장 교동이발관, 망향 70년 지광식 할아버지 이야기
강화평화전망대를 찾아 가기 직전, 먼저 들렸던 강화군 교동면 교동섬에서 만난 82세의 실향민 지광식(池光植) 할아버지는 실향 70년의 한(恨)과 망향의 간절함을 소상하게 이야기 해 주셨다. 하늘을 나르는 새들과 남북을 가르는 강물 속의 물고기들도 자유롭게 남북을 오고 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이 스스로가 갈라 놓은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지 못하며 한 맺힌 삶을 살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고향으로 돌아 간다는 꿈과 희망은 포기할 수가 없다고 하신다.
지광식 할아버지는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열한 살 나이 때, 동네 어른들을 따라 살던 고향마을, 당시의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남당리 마을 앞 남진포 포구에서 배를 타고 남한 땅인 강화도의 교동섬으로 피난을 왔다고 했다. 북한 땅 고향마을에서 남한 땅 교동섬까지는 물길 20리, 약 7km의 거리다. 전쟁이 끝나면 모두가 바로 고향으로 돌아 가겠다는 다짐이었다는데, 이제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을 넘고 또 너머 70년의 세월까지 넘겼다며 허탈해 하신다. 당시 교동섬에는 북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집단이주라도 한 듯, 서로가 다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전쟁은 이어지고 귀향이 어려워 지자, 피난민 일부는 더 먼 남쪽으로 갔다고 했다. 교동섬에 남은 사람들은 생계의 방편으로 허허벌판 피난 온 정착지에 자신들이 살던 고향마을 가까운 곳, 대룡리(大龍里)에 있었던 연백장의 모습 그대로를 본 따서 만든 골목시장을 개설했다고 한다.
강화도 본섬에서 교동도까지는 2014년 연육교인 교동대교(3.44km)가 개통되었고 교동도(섬)는 지금 보석처럼 반짝 반짝 빛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 중심이 대룡시장이다.
반세기 전으로 되돌아 가 본 시간여행…대룡시장 골목길을 걷다
대룡시장 골목안으로 들어 섰다. 초여름의 무더운 날씨, 허름한 건물벽면에 그려 진 첫 번째로 만난 벽화의 한 컷에서 “아이스케이키~” 하고 외치는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골목 안 길이 좁기는 했지만, ‘차 없는 거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참 잘한 조치라는 생각이다. 골목 길 양 쪽으로는 금방 찌그러질 것 같은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들어 서 있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갔고 오랫동안 이대로 잘 보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만약에 이 정겨운 ‘옛날식’ 건물들이 ‘현대식’ 건물들로 개조 된다면 어떻게 하지? 엉뚱한 걱정이 앞섰다. 건물 벽면에는 세련되지 않은 옛날식 벽보들이 많이 붙어 있다.
여러 컷의 벽화들도 그려져 있다. 골목 곳곳에는 반세기 전 생활상을 떠 올리게 하는 조형물들도 재현되어 ‘관광명소’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온다. 시장 안 풍경들이 엄청 난 관광자원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교동이발관’은 눈에 확 띄는 소재다. 주인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압권이고 반 세기 전의 이발관 모습이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기네스 북’에 등재될 수도 있을 법하다. 이발관 안 벽면에는 1965년 7월 10일, 공중위생법에 따라 경기도지사가 교부한 이용사면허증(지광식)이 걸려 있다.
다른 한 쪽 벽면에는 당시 어느 이발관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평화로운 농촌풍경, ‘이발소 명화’가 옛 명성을 자랑하고 있다. 이발관의 간판 윗 편에다 둥지를 틀고, 대를 이어가며 할아버지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제비가족의 보금자리 두 동(棟)이 객의 눈을 크게 자극했다. 아무리 많은 돈으로도 살 수가 없는 귀하고도 기이한 재비들의 단독주택이다.
글_우촌 박재곤
사진_강화군청 제공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