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터 무늬 있는 ‘안양박물관’

고려시대와 현재를 잇는 ‘역사의 가교’

안양박물관 상설전시실 2층에선 안양의 선사·고대 모습을 청동기시대 관양동 유적 및 삼국시대 토기로 배우고, 안양의 기원이 된 안양사지 유적 및 다양한 도자유물로 화려했던 고려시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안양박물관 상설전시실 2층에선 안양의 선사·고대 모습을 청동기시대 관양동 유적 및 삼국시대 토기로 배우고, 안양의 기원이 된 안양사지 유적 및 다양한 도자유물로 화려했던 고려시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안양박물관은 안양시 만안구 예술공원로 103번길 4(석수동)에 위치한다.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가 있었던 자리이다. 바둑판처럼 배치되어 있는 많은 주춧돌은 그 흔적이다. 이 흔적 옆에 안양박물관과 김중업건축박물관 그리고 교육관과 특별전시관이 배치되어 있다. 이 건물들은 외관상으로 보면 전혀 박물관처럼 보이지 않는다. 박물관 정문에 설치된 초소도 생뚱맞다. 그러나 과거는 현재의 삶으로 연장되고 누적된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짜임을 통해 늘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낸다. 안양박물관에는 그 흔적이 역력하다.

안양박물관은 1959년 유특한 회장이 제약회사 유유산업을 설립한 후 안양공장으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안양박물관 외벽 귀퉁이에 그대로 남아 있는 ‘파이오니아상’과 ‘모자상’이 그 증거이다. 개척자 정신을 뜻하는 ‘파이오니아상’과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품듯 지극정성과 사랑을 의미하는 ‘모자상’은 유유산업 경영철학이 담겨 있다. 유유산업 공장건물은 한국 근현대 건축의 거장인 건축가 김중업(김중업, 1922~1988)이 설계했다. 그래서 안양박물관은 고대 중세 현대라는 시간의 층들을 켜켜이 담아내는 ‘터 무늬 있는 박물관’이다.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기와.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기와.

안양박물관은 2004년 평촌아트홀의 안양역사관으로부터 시작된다. 유유산업이 공장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안양시에서는 부지를 매입하여 안양사(安養寺) 터를 발굴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안양사(安養寺)’라는 명문와편(銘文瓦片)이 발굴되었다. 그동안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안양이란 지명이 구체적인 유물로 고증된 것이다. 이로써 안양의 역사와 뿌리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토대와 안양의 역사적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안양시는 기존의 안양역사관을 안양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한 후 2017년 지금의 자리에서 새롭게 출발하였다.

박물관 입구에서 바라보면 우리나라 보물4호인 중초사터 당간지주와 안양박물관, 관악산을 한번에 담을 수 있는 사진포인트가 있다. 중초사터 당간지주엔 신라시대 중초사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모두 6행 123자로 조성년대를 확실히 기록한 당간지주로서 보물로 인정받았다. 윤원규기자

 

박물관 정문에 들어서면 보물 제4호 중초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 불화를 그린 기(당幢)를 걸던 당간을 지탱하기 위하여 당간 좌·우에 세우는 기둥)와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서 있다. 안양박물관 바로 옆 24개의 기둥은 구조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빔’ 그 자체를 떠받들고 있는 느낌이다. 자칫 해체된 건물의 잔해로 없어질 뻔했으나 가운데 8개 기둥에 수메르설형문자 등 여러 문명에서 사라진 문자들을 새겨 넣음으로써 24개의 기둥은 살아 움직이는 건축언어로 재탄생되었다. 안양박물관이 역사문화의 명소로 자리매김하는 또 하나의 기발한 디자인이 아닐 수 없다.

안양시 근대화와 변천사를 볼 수 있는 디오라마.
안양시 근대화와 변천사를 볼 수 있는 디오라마.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은 “안양사의 탑은 태조가 세운 옛것이다”(도은집 권4)라고 증언한다.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안양사를 방문(대각국사문집 권1)했다는 기록과 안양사. 흥왕사, 왕륜사의 승려가 거병하여 무신정권의 최충헌(1149~1219) 척살을 주도하다 실패했다(고려사 권42)는 사건도 보인다. 고려 말 최영장군이 안양사 칠층전탑을 중수하는데 승려 천 명이 불사를 올리고 보시한 시중이 삼천이었다(도은집 권4)는 기록으로 본다면 안양사는 고려 초기에서부터 말기까지 시대마다 정치적 종교적으로 대단히 주목받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교국가인 조선에 들어서면서 안양이라는 지명이 주목을 받은 사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태종 때는 농번기 때 금주해야 하는데도 수원부사, 금천현감, 과천현감이 안양사에서 기생을 불러 음주 가무를 즐기다 급기야 금천현감이 죽는 사건이 발생(태종실록 권33)했으며, 조정에서 사찰의 폐단을 논할 때 안양사가 거론되고 있다.(문종실록 권4) 조선시대에는 행정구역의 편제에도 제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양이라는 지명이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에 의해 1905년 경부선철도가 개통되고 안양역이 신설되면서부터이다.

안양박물관은 유유산업의 공장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재활용했다. 건축은 인체와도 같다는 김중업의 말처럼 이 건물은 사람처럼 육체적이다. 안양박물관은 건물의 뼈대를 여실히 드러낸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 전시다. 1층에는 어린이 체험실이 호기심 많은 어린이를 기다린다. 2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전시실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 유물까지 안양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전시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삶의 시작 부분이다. 안양 관양동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구멍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돌창 등은 안양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금동 용머리.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금동 용머리.

둘째는 안양의 기원이다. 안양사가 새겨진 기와 조각 등 안양사지에서 출토된 중요 유물들이 전시된다. 우리는 안양이 왜 안양인지 확실한 역사적 유물과 마주하게 된다. 이때 유물은 말없이 안양을 안양이라 부르고 그 침묵의 소리에 안양은 비로소 안양으로 깨어난다.

셋째는 조선시대 문화의 전승을 소개한다. 조선시대 안양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에서 화성으로 이장한 후 현원릉이라 이름하고 능행차를 위해 만안교를 축조하면서 그 중요성이 부각된다. 당시 6천여명의 수행원과 100여명의 악대가 행진하던 어가행렬의 모습이 정교한 모형으로 진열되어 있다. 안양의 민속놀이와 마을제도 챙겨 볼만하다. 안양 지역에서 마을제로 풍요와 무병장수와 번영을 기원하는 관악산신제 등이 봉행 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만안교가 건립된 후 시작된 다리밟기 놀이는 안양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그릇을 빚는 도요지(陶窯地), 즉 가마터도 확인 가능하다. 가마터는 불당골 도요지와 비산동 도요지가 확인되고 있는데 특히 비산동 도요지는 서울 근교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청자도요지이자 고려 후기 백자가마터이다. 때문에 고려 후기 백자의 양상과 조선 백자의 성립과정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도요지로 평가받고 있다.

박물관은 안양의 농민항쟁과 항일투쟁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해 두었다. 안양지역에서는 1898년(고종 35년) 군수의 탐학과 학정에 저항하여 일어난 제1차 농민봉기와 1904년(고종 41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위해 한국인 역부를 강제동원하려 하자 향회를 열어 조직적으로 저항한 제2차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이는 안양 사람들이 사회적 불의에 어떻게 항거했고 항일의식은 또 어떠했는지 가히 짐작할만한 대목이다.

안양 출신 독립운동가 역시 치열하다. 이재천(李在天, 1913~?)은 중국 상하이에 망명 중이던 아버지 이용환을 따라 중국으로 가서 한국소년동맹을 조직하고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중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잠입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이재천의 동생 이재현(李在賢, 1917~1997)은 17살의 나이에 임시정부 특별훈련반에 입대하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광복군에 편성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백범 김구는 결혼하는 그에게 평생을 혁명과 함께하라며 “혁명반려(革命伴侶)”라는 유묵을 써준다. 또한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시흥, 안양, 군포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가행진을 주도한 몽당(蒙堂) 한항길(韓恒吉, 1897~1979) 등이 대표적이다.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위치하고 있는 안양 박물관은 2004년 9월 평촌아트홀에 ‘안양역사관’으로 개관, 이후 2015년‘안양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2017년 9월 안양예술공원 내 새롭게 개관했다. 사진은 안양박물관 전경.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위치하고 있는 안양 박물관은 2004년 9월 평촌아트홀에 ‘안양역사관’으로 개관, 이후 2015년‘안양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2017년 9월 안양예술공원 내 새롭게 개관했다. 사진은 안양박물관 전경.

넷째는 근현대 도시의 성장이다. 안양은 1960년대 근대화의 추진과 함께 공업도시의 면모를 갖추며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준비된 영상 자료는 그 당시의 거리풍경, 영화관, 여가와 문화, 정치와 사회 등 그 시절의 추억을 소환한다. 특히 안양은 영화제작의 메카였다. 안양영화촬영소는 동양 최대를 자랑했다. 한국영화계의 거목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가 제작한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벙어리 삼룡이(1964), 빨간 마후라(1964) 등의 영화전단지는 시대의 울림으로 남아 있다.

안양박물관은 안양의 성지(聖地)이다. 안양(安養)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라는 의미이다. 안양사 터에서 발굴된 기와의 파편들은 안양의 세계를 기원하는 건축어휘들이다. 어휘가 다르면 철학이 다르다. 철학이 다르면 건축물도 다르다. 안양사의 주인공들은 안양을 위해 이 세계를 어떻게 건축하려 했을까. 우리는 ‘지금 여기’의 터전 위에서 나와 공동체의 안양을 위해 이 세계를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 안양박물관에 가면 그 질문의 파편들이 말을 걸어온다.

권행완(정치학박사, 다산연구소)

사진=윤원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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