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넘어… ‘수확의 행복’ 만끽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다’는 속담이 있다. 계절은 봄날, 아직 보리는 익지도 않았는데 지난해 가을에 추수한 식량은 이미 바닥이 났다. 그래서 봄날은 궁핍했다. 암담하고 궁핍했던 봄날. 보리가 익을 때까지 넘어야만 하는 춘궁기 보릿고개. 가수 진성이 2015년에 발표한 노래(작곡 김도일) ‘보릿고개’는 가수 스스로가 작사한 노랫말이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 가운데 가요계를 강타, 트롯의 붐을 타고 지금 크게 히트하고 있다.
아야 뛰지마라 배 꺼질라/가슴시린 보릿고개 길/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초근목피의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한 많은 보릿고개여/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지금 60대 이상의 사람들은 애절한 이 노랫말에 가슴이 시려질 것이고 어머님의 한숨과 통곡이 가슴에 와 닿을 것이리라. 얼마나 먹을 것이 없었던지 초근목피(草根木皮),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기도 했던 그 시절을 지금 자라고 있는 세대들은 이해하기 참으로 어려운 일이겠다. 하지만, 불과 60년 전, 이것은 바로 이 땅의 사람들이 겪었던 엄연한 현실이었다.
1960년대, 도농간의 인구가 8대2 의 시절, 대다수 국민들은 농촌이 생활의 터전이었다. 보리농사를 지으며 늘 보리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보리밭을 거릴었다. 엄동이 지나면 들판에는 파릇파릇한 보리싹이 돋아나고 넓은 보리밭은 초록의 한 폭 그림이 된다. 보리이삭이 피어나면 철 없는 아이들은 이삭이 팬 보릿대를 꺾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었고 추수를 끝내고 쌓인 보릿짚 무더기는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나를 멈춘다/옛 생각이 외로워/휘파람 불면/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70년 전, 시인 박화목은 보리밭을 걸어가는 외로운 이의 그리움과 쓸쓸함을 한 편의 시에 담았다. 이 시에 작곡가 윤용하는 곡을 입혔고 이 가요는 지금도 애창되고 있는 불후의 명곡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돌이켜 보고 새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보릿고개마을이 그 온고지신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전통 농촌체험마을이다. 이 체험마을은 용문산 아래 쪽 상원사 가는 길 용문면 연수리에 있다. 뒤로 북쪽에 용문산 정상과 백운봉이 자리 잡고 남쪽이 트이고 동쪽과 서쪽에 높은 산이 없어서 산골마을 치고는 햇볕이 잘 들고 하루해가 많이 드는 마을이며 산골마을답게 밤낮의 일교차가 커서 과일과 곡식의 당도가 아주 높은 마을이다. 보릿고개마을의 주변 자연 풍광과 어우러진 정겨운 옛 지명들이 전해지는데 태남길, 수득골길, 귀골길, 솔골길, 오래골, 상원골, 당재, 사그메기 등이다. 그 이름들은 나름대로 연유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귀골(길)은 용문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골짜기의 모습이 마치 귓바퀴 같다고 하여 귀골길이라고 했다 한다. 또한 마을은 수도권 근교의 마을로는 보기 드물게 옛 돌담길 등 전통농경사회에서 서로 도우며 살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자연부락의 형태를 아직도 잘 보전하고 있다. 이 돌담길 등 전통농촌마을의 원형을 기반으로 하여 일반 학생부터 가족들, 외국인까지 다양한 계층의 체험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마을이다.
도시속의 번잡함과 소란을 멀리 두고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은 아담하고 봉긋한 산과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 함께 하는 마을이다. 평화로운 자연의 소리와 풍경이 반겨주는 이곳에서 도시생활의 찌던 일상, 지쳐있는 몸과 마음을 잠시나마 훌훌 털어 버려 볼만 한 쉼터이기도 하다.
보릿고개체험마을은 협동조합의 형태로 운영되는데 마을 주민, 62명이 회원으로 참여하여 도시사람들에게 궁핍했던 그 때 그 시절을 회고토록 하고 농촌생활을 체험토록 해주는 마을이다.
40대에서 80대까지의 주민들이 마을공동체를 결성하여 운영하고 있는 양평 보릿고갯마을의 원용우(元容禹) 위원장은 자신들의 마을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마을, 이사 와서 살고 싶어 하는 행복한 마을로 꾸미겠다는 단단한 다짐으로 힘을 모우고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인정이 넘쳐 나는 마을을 찾아 오셔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산바람을 마시고 가실 것을 권유드린다고 했다.
양평 보릿고갯마을에서는 매우 다양한 계절별 체험프로그램을 짜놓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전통음식체험을 위시하여 자연생태체험, 농사체험 등이 주요 프로그램인데 전통공예와 전통놀이도 해 볼 수 있다. 콩으로 순두부를 만들어 보고, 디딜방아에 보리를 넣고 찧은 보리가루로 보리개떡을 만들어 먹어 본다. 쑥과 호박으로 쑥개떡과 호박개떡도 만들어 본다. 인절미를 만들어 함께 나누어 먹기도 한다. 밭에 나가서 고구마와 감자를 캐고 옥수수를 따고 복숭아밭에도 간다. 농산물수확체험을 해 보는 것이다. 농촌마을을 둘러보고 밤에는 모닥불에 둘러앉아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먹으며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해 본다. 보리밥과 제철음식을 맛본다는 것은 빠뜨릴 수 없는 필수이겠다.
어린 시절 아빠 엄마를 따라가서 농촌의 이런 체험을 한차례 해 본다는 것은 일생을 두고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는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용문산을 오르겠다는 산꾼이라면 가족 모두가 이 보릿고개마을에서 1박 하고 부인과 애기들은 마을에서 농촌체험을 하도록 하고 산을 다녀 오는 것도 좋겠다.
옛고향의 정취가 그대로 살아있는 청정한 자연환경에서 재배한 과일들을 수확해 보는 즐거움도 만끽할 수가 있다. 복숭아와 배가 이 마을의 특산과일이기도 한데, 일교차가 심한 산속의 기후로 이곳에서 나오는 복숭아는 그 당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글=우촌 박재곤
사진=이호남 양평 보릿고개마을 사무장
양평 보릿고개마을 찾아 가는 길
위 치 : 양평군 용문면 연안길 23-1 (주차장주소 용문면 연수리 167번지 일대)
문 의 : 031-774-7786 010-4400-7786 (마을 사무장) (오전 9시~오후 6시까지)
자가용 이용시
6번국도 : 서울 → 미사리 → 팔당대교 →양평→ 용문 → 연수리
37번국도 : 이천톨게이트 → 이천 → 천서리 →개군 → 양평 → 용문 → 연수리
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이천IC→ 이포대교 → 천서리 사거리 → 용문 →용문소방서 → 연수로 3㎞ 직진 → 연안상회 → 보릿고개체험마을
대중교통 이용시
버스 : 동서울(상봉)터미널홍천방면 버스
승차 → 용문터미널 하차 ※ 연수리행버스 : 7:00, 9:00, 11:00, 12:00,15:40, 17:00, 18:40
전철 : 용산에서 용문까지(20분 간격) 용문역에서 택시로 10분 거리
기차 : 청량리역 중앙선 원주, 제천방면 승차 →용문역 하차
일제 강점기 식량수탈·해방직후 등 힘든 시기 함께한 ‘보리’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라고 했다. ‘먹는 것이 만백성의 하늘’이라는 뜻이다. 기원전 90년 경, 고대 중국을 무대로 ‘역사와 인간’을 탐구한 사마천(司馬遷)의 역사서에 담긴 내용이다. ‘민이식위천’은 2천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모든 인류에게 그 때나 다를 바 없는 엄연한 진리다.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주식은 쌀밥이었고 그 다음이 보리밥이나 잡곡밥으로 맥이 이어져 왔다. 우리나라에서 쌀을 생산해 내는 벼농사의 시작은 적어도 서기 1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리는 한자로 대맥(大麥)이라고 하며 지구상의 식량작물로는 가장 오래된 작물 중의 하나다.
7천년 전에 야생종으로 재배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세계적으로는 다양한 기후조건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보리를 처음으로 들여온 시기가 중국 서기전 1세기경에 전래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쌀밥의 별칭인 ‘이(李)밥’이 조선왕조의 ‘이씨(李氏)’들이나 상류사회의 음식이었음을 말해 주는 반면, 보리밥은 서민층들이 먹었던 주식(主食)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이런 가운데 일제 강점기에는 호남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쌀을 군산항과 목포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수탈해 갔다. 음력 4월에 이르면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 수확을 애타게 기다리게 했다. 이 시기가 바로 ‘보릿고개’로, 식량부족의 궁핍한 춘궁기(春窮期)의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보리가 익을 때까지 산과 들을 헤매며 초근목피(草根木皮), 나무껍질이나 나물을 캐다 먹으며 연명을 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보릿고개는 일제의 식량수탈과 해방직후의 사회적인 혼란과 전쟁을 거치면서 계속 이어졌다. 1970년대에 접어 들면서 정부의 식량증산정책에 따라 통일벼의 파격적인 생산량으로 보릿고개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1977년에는 10㏊당 벼 평균 수확량이 500㎏에 육박했다. 드디어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녹색 혁명으로 인해 식량자급자족시대로 접어 든 것이었다. 2020년, 이제는 벼가 자라기엔 매우 건조하고 척박한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사막에서 농촌진흥청의 농업기술이 2020년 5월, 벼를 재배한 후 첫수확을 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들에게 전해 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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