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어주는 남자] 오래된 일

오래된 일

              - 허수경​

네가 나를 슬몃 바라보자

나는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어린 연두 물빛이 네 마음의 가녘에서

숨을 가두며 살랑거렸는지도

오래된 일

봄저녁 어두컴컴해서

주소 없는 꽃엽서들은 가버리고

벗 없이 마신 술은

눈썹에 든 애먼 꽃술에 어려

네 눈이 바라보던

내 눈의 뿌연 거울은

하냥 먼 너머로 사라졌네

눈동자의 시절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억의 팔 할은 슬픔인 듯하다. 기뻤던 일은 금세 휘발돼 아련해지지만 슬펐던 일은 응어리져 마음에 오래 남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가 느끼는 대개의 슬픔은 타자로부터 생겨난다. 나와 타자는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고 엇갈림이다. 사랑도 엇갈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이면은 슬픔이다. 엇갈리지 않는 완벽한 사랑은 신들의 몫이다. 인간은 엇갈리기 때문에 사랑하고, 엇갈리기 때문에 헤어진다. 그것이 사랑의 역설이다.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사랑은 불멸의 유혹이 된다. 우리의 사랑은 엇갈림의 상처를 회상함으로써 뒤늦게 완성된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내가 너를 아프게 하였기에, 혹은 네가 나를 아프게 하였기에 사랑은 기억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진실한 의무다. 하여, 회상되지 않는 사랑은 가짜다. 

허수경 시인의 「오래된 일」은 ‘지독한 봄날의 일’을 회상한다. 그 봄날의 일이 사랑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남모르게 슬며시 보내는 그의 눈길에 떨며 고개를 수그리는 화자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그의 ‘가녘’에서 숨을 가두며 살랑거리는 ‘어린 연두 물빛’처럼 싱그럽고 투명하다. 그를 향한 사랑을 ‘어린 연두 물빛’으로 비유할 만큼 화자의 사랑은 애절했지만 “주소 없는 꽃엽서”와 “벗 없이 마신 술”이라는 표현에서처럼 견디기 어려운 어떤 엇갈림의 사연으로 둘의 사랑은 ‘지독한 봄날’이 된다. “네 눈이 바라보던/내 눈의 뿌연 거울”처럼 그는 내 눈에 서린 슬픔을 보지만 기실 “내 눈의 뿌연 거울”에 비친 것은 그에 대한 하염없는 사랑일 것이다. 내가 너를 보는 것과 네가 나를 보는 시선의 엇갈림으로 사랑은 “하냥 먼 너머”로 사라지는 ‘오래된 일’이 된다.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할 만큼 지독히 사랑했던 봄날의 시간은 엇갈림의 시선으로 ‘오래된 일’이 되었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는 현재의 시간으로 회귀 된다는 것이 시 「오래된 일」의 전언일 것이다. 잊혀지는 사랑은 없다. 잊혀진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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