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와 조삼모사

중국 송나라에 원숭이를 좋아하는 저공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키우던 원숭이의 수가 늘어나면서 먹이인 도토리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에 저공은 원숭이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도토리를 아침에 세게, 저녁에 네 개씩 주겠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반발하고 나섰다. 저공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겠다.”고 하자 원숭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고 한다.

얕은 꾀, 잔 술수에 현혹돼 눈앞에 보이는 차이만 알고 결과가 같은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상황을 비유할 때 쓰이는 사자성어,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다. 그런데 이처럼 잔꾀로 상대를 기만하고 민의를 왜곡하는 일이 한국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4월,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해 여야 4당이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후 공직선거법 개정안 등 4개 법안을 패스트트랙에 넘기려 하자 당시 자유한국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 과정에서 동료 의원을 감금하거나 국회 기물이 파손됐고 심지어 몸싸움까지 벌어지는 등 물리적 충돌도 발생했다. 민생은 뒷전이고 국회는 마비됐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정당득표율이 곧 의석수로 연결되기 때문에 사표를 최소화하고 유권자의 한 표 한 표가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 도입 자체는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처럼 거대 양당의 등장을 막고 다당제를 확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역구(299명)와 비례 의석수(299명)가 같은 독일과 달리 한국은 전체 의석수 300석 중에서 비례대표는 47석에 불과하다. 그것도 캡을 씌워 30석에 한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도(연동률 50%)를 도입한 반쪽짜리 제도인데다가 이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여야 정치권의 갈등과 반발로 당초 취지와 다르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4.15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과 통합당은 비례의석을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온갖 꼼수와 편법을 동원하고 있다. 거대 정당이 비례대표를 내놓지 않은 현상도 초유의 일이지만 자신의 위성정당 순번을 높이기 위해 불출마를 선언한 현역 의원들을 이적시키거나 의원 꿔주기가 아무렇지 않게 이뤄지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2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배포한 자료에 따르면 이번 총선에서 비례 선거 투표용지에 기호 1번 더불어민주당과 기호 2번 미래통합당은 없었다. 전국 통일 기호를 부여받은 민생당(3번)이 첫 칸을 차지하고 이어 미래한국당(4번), 더불어시민당(5번), 정의당(6번) 순으로 기재된다고 한다. 이러려고 지난 1년 동안 그 난리를 치렀나? 최악의 국회, 일 안하는 국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말이다.

거창하게 시작했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결과적으로 거대 양당들이 비례대표를 싹쓸이하기 위한 제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총선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앞으로 다시 쓸 수 없는 제도가 돼버린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조삼모사 정치의 희생양으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 아닐까?

이도형 홍익정경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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