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풀 위에 쌓이는 눈
- 정병근
눈 온다
눈 쌓인다
강아지풀 눈 받는다
누비이불을 덮어쓴
길이 맨발로 걸어온다
이름도 정부政府도 없는
한 생각이 흔들린다
잘못되지 않으리
세상에
헛사는 것은 없네
천지간 눈 온다
강아지풀 눈 받는다
독려도 교훈도 없이
전 규모로
전속력으로
눈 온다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2020.
‘타블라 라사’(tabla rasa)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빈 서판(書板)을 뜻하는 라틴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본성이 원래 깨끗하다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차용한 타블라 라사는 존 로크와 니체 등 여러 철학자에 의해 인용되곤 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태블릿 PC의 ‘태블릿’(Tablet)이라는 어원도 타블라에서 온 것이다. 삶이라 서판에 무언가를 그리거나 혹은 쓰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빈 서판을 갖고 태어났는지 아니면 밑그림이 그려진 서판을 가지고 태어났는지 확언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빈 서판이든 아니든 간에 뭔가를 채우려는 자유의지를 갖게 되었을 즈음이 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불현듯 삶이, 생활이, 인간관계들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병근 시인의 시 「강아지풀 위에 쌓이는 눈」을 읽으며 나는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는 자유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다시 해보았다. 어렵게 설명하면 어렵지만 쉽게 설명하면 쉬운 게 자유의 의미일 것이다. 시인은 “눈 온다/눈 쌓인다/강아지풀 눈 받는다”는 표현으로 간명하게 자유를 설명한다. 눈이 오면 눈을 맞는 것, 그것이 자유다. 눈이 쌓이고, 강아지풀이 눈을 맞고, 누비이불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길들이 맨발로 걸어 나오는 자유의 풍경들을 시인은 “이름도 정부(政府)도 없는 한 생각”으로 모아서 비유한다. 드러내야 할 이름도 없고, 행사해야 할 권력도 없는 게 자유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이름을 찾고 정부를 찾는다. 눈 내리는 풍경을 좋아하면서도 길이 얼어 차가 막힐 것을 걱정한다.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어딘 가에 다시 귀속되려 한다. 불안 때문에 그렇다. “한 생각이 흔들린다”는 것은 자유를 추구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가로막는 생활의 논리 때문에 생긴 갈등일 것이다. 지금의 내 삶이 흔들리고 있지만, 잘못되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헛사는 것은 없다는 믿음으로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는 자유에의 의지를 시인은 ‘독려’도 ‘교훈’도 없이 ‘전 규모’로 ‘전속력’으로 천지간에 내리는 눈을 통해 드러낸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빈 서판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타인의 독려나 교훈이라는 밑그림을 지워야 한다. 내리는 눈처럼, ‘전 규모’의 의지와 ‘전 속력’의 행동으로 타인의 독려와 교훈을 덮는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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