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다양한 행사를 가졌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전 세계로 확산된 코로나19 감염자가 한국에서도 속출함으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한국은 초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듯 했지만, 대구 신천지 집회 참석자들의 집단 감염이 발생하면서 급속하게 퍼져 확진자가 3천명을 넘었다. 이에 박물관은 임시 휴관을 하고, 각 학교는 개학을 연기했으며, 집단시설이나 다중 이용시설들을 집중 방역하는 등, 코로나19의 지역사회 확산방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00년 전 3·1운동과 강우규 열사의 투탄의거 등, 독립의 열기가 고조되던 1919년과 1920년에는 전염병인 콜레라의 유행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1919년은 1만6천991명의 환자가, 1920년은 2만4천229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일제 강점기 기간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희생을 당했다.
콜레라는 본래 인도 벵골 지역에서 발생했던 풍토병으로 19세기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 개척 등으로 인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전 세계로 급속하게 퍼졌다.
당시 종교인들은 ‘부조리한 미국 사회의 체제’때문에 콜레라가 발생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전염병이 급증한 아일랜드 이민자들 때문이라는 반(反)이민 정서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콜레라의 발생 원인이 비위생적인 환경에 있다고 보고 정화조 설치와 하수처리 시설 설립 등 위생개혁과 전문 의료 인력의 활용, 공중 보건법 제정 및 의사 전문성 강화를 통한 의료개혁을 통해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919년과 1920년 식민지 조선은 유행성 콜레라를 쥐 병 혹은 호열자라고 하였는데, 미신적인 태도와 각종 유언비어,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방역 정책에 대한 반발과 보균자 수용을 둘러싼 경찰과의 충돌 등으로 효과적인 방역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문화통치 하에 발행한 조선어 신문을 통해 콜레라 예방을 위한 주의 사항을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게 되었다. 방역 당국의 무책임하거나 강압적인 태도에는 반발하면서도 근대적 방역 활동은 수용하고, 전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조직된 청년회 등, 자발적인 방역단의 활동으로 전염병 예방과 소독 등, 공중위생과 질병예방에 대한 의식을 높이게 됐다.
100년 전과 비교할 때 한국의 현대 의료기술이나 공중보건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를 만큼 발전했다. 방역 당국의 효과적이고 책임 있는 활동과 국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코로나19를 조속히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언론은 공중보건의 차원에서 방역 당국의 정책에 대한 건설적인 비판과 올바른 정보 전달로 코로나19의 확산방지와 치유를 위해 노력하고, 지역 사회의 갈등을 최소화함으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3·1운동은 만세만 부른 것이 아니라 “대한의 주권은 대한시민에게 있으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천권”임을 천명하면서 ‘독립’과 동시에 ‘민주공화’의 실현을 선언한 시민주권시대의 첫걸음이었다. 오늘 이 시대에 3·1운동의 진정한 의미는 기념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가적 위기와 어려움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임봉대 국제성서박물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