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39세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그때 친척들과 마을 어른들이 저에게 와서 위로하면서 “엄마가 좋은 곳에 가셨으니 울지 마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장례식을 하는 동안 제대로 울지 못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제대로 울지 못했다. 우는 것은 약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믿음이 없는 행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상담을 공부하면서 슬픔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슬픔의 감정에 공감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떤 프로그램에서 마음껏 우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내 안에 부모님의 죽음 앞에서 억눌렀던 슬픔의 감정이 밀려오는데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한참 울고 나니까 내 안에 막힌 무엇인가가 뚫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픔을 참는 것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충분한 애도가 있어야 일상으로 회복하는 데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장례식에서 마음껏 슬픔을 표현하고 슬퍼해야 한다. 마음껏 슬픔을 표현해야 새로운 생명과 위로를 느낄 수가 있다.
그런 의미로 애통한 마음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사랑 없이는 진정으로 슬퍼할 수 없다. 사랑하기에 느끼는 아픔이다. 사랑 안에서 아파하고 사랑하고 고통에 동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의 정도만큼 아파하는 것이다. 나와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은 사람일수록 더욱 큰 슬픔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다른 사람 그리고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남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슬퍼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많은 사람이 자신의 문제에 몰입되어 남의 아픔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삶이 지속하다 보니 이제는 그럴 여유도 시간도 없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내 이웃의 고통에 대해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릴 여유가 없는 것이다.
어떤 시인의 글에 이런 문구가 있다. “아픈 이를 치유하시는 당신은 고통을 없애는 이가 아니라 그 아픔의 뜻을 알게 하시는 이십니다. 눈먼 자를 치유하시는 당신은 어둠을 없애는 이가 아니라 빛의 환희를 알게 하시는 이십니다. 당신의 치유는 사랑의 깊음에서 오는 생명의 오름입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전 세계에 긴장하고 언론에 집중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3일부터 도시 봉쇄에 들어간 우한시 거주 시민들이 “우한 짜요(武漢加油: 우한 힘내라)”를 외치며 서로 격려하고 있다. 웨이보(중국 SNS)에 업로드 된 다수의 영상 속에는 자가 격리 중인 우한의 시민들이 아파트 단지에서 ‘우한 짜요’를 외치며 함께 전염병과 싸우는 다른 시민들을 응원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영상 속에는 창문 가에 서서 중국 국기(오성홍기)를 흔들며 중국 국가를 함께 부르는 우한 시민들의 모습도 찾을 수 있다. 지금 이 힘든 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연대하는 것이 전 세계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길이다.
안해용 경기도교육청 학생위기지원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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