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마키아벨리 유령은 살아있다

“대중은 왜 항상 소수에 당하는가? 그들이 울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분노하기 때문이다. 울지도 말고 분노하지도 마라. 역사는 울보에게도 분노하는 자에게도 (권력을) 맡기지 않는다.”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마키아벨리(Machiavelli)는 1512년 ‘군주론(君主論)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걸핏하면 흥분하고 쉽게 손뼉치는 ‘냄비근성’의 대중들은 이 때문에 늘 당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 주장이 과격하고 권모술수의 교본 같기도 하지만 특별한 맛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 등 많은 서양사 학자들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여러 형태의 글로 발표를 했다.

그러면 마키아벨리에게 이와 같은 주장을 강하게 심어 준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보나롤라가 권력을 잡은 과정, 그리고 그의 참담한 몰락이었고 여기에서 깊은 영감을 얻었다.

사보나롤라는 1490년 역사적인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세운 산 마르코 수도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교황청의 타락을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등 명설교로 시민들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494년 11월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왔다. 샤롤 8세 왕이 직접 프랑스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영토를 깊숙이 점령했는데 피렌체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사보나롤라가 프랑스 진영으로 들어가 샤롤8세 왕 앞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하여 마침내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싸우지 않고 적을 물리친 것이다. 그러자 금세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영웅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4년간 통치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잡자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여 항소할 권리도 주지 않은 채 5명을 사형시키는가 하면 경제난이 닥치자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무능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때 마키아벨리는 누구나 권력을 잡으면 변한다는 것, 국난이 닥쳤을 때 아마추어로서는 위기극복에 한계가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사보나롤라는 점점 국민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교황청으로부터 경제 제재까지 가해졌다. 사보나롤라가 교황청을 계속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수사가 정적이 되어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분노한 시민들은 1498년 5월 사보나롤라를 권좌에서 끌어내 감옥에 가두었다가 바로 시뇨리라 광장에서 화형(火刑)에 처하고 말았다. 끔찍한 권력의 반전(反轉)이었다.

지금도 그 광장에는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한 자리에 기념 동판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집필, 당시 권력자 메디치에게 헌정하여 자신의 등용을 노렸으나 그가 죽은 후에야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고 책이 나와서도 한동안 금서(禁書)로 낙인 찍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결국 권력을 유지하고 국가를 수호하며 번영케 하는 군주가 되려면 때로는 여우가 되고 때로는 사자가 되어 권모술수를 적절히 발휘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때 사자가 되고 어떤 때 여우가 돼야 하는가?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규범을 어겨도 좋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사악(邪惡)하거나 무법자라는 비난쯤은 감수할 수 있어야 군주가 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민주주의 시대에도 가능한 논리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도 많은 정치인이 은근히 마키아벨리의 이 논리를 믿고 있으며 어제의 말을 오늘 뒤집는 등 자신의 도덕적 배신과 위선을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빌려 위로하고 변명 거리로 삼고 있다. 마키아벨리의 유령(幽靈)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게 비극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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