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분의 사랑
- 배영옥
나의 미소가
한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걸 알고 난 후
나의 여생이 바뀌었다
백날을 함께 살고
백날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가슴속에 품고 있던 공기마저 온기를 잃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로
내 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의 세상을 펼쳐보기도 전에
아뿔싸,
나는 벌써 죄인이 되었구나
한 사람에게 남겨줄 건 상처뿐인데
어쩌랴
한사코 막무가내인 저 사람을……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2019.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은 ‘여분’이다. 삶이란 ‘몫’으로 태어나 여분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실존의 몫을 부여받고, 그 몫으로 가족과 연인과 친구를 만나며 기쁨과 슬픔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일생이다. 우리는 삶의 여분이 얼마큼 남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여분을 사는 게 삶이라는 생각의 전환은 대개 어떤 변곡점을 만났을 때 하게 된다. 그 변곡의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계기들은 비슷하다. 몹시 아팠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을 했을 경우 우리는 지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여분의 시간은 애절하고 슬프다. 그러나 여분의 간곡함을 앎으로써 삶은 더없이 고귀해지고 아름다워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주고 모든 것을 앗아가면서 냉정히 흘러간다. 그 냉정함에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배영옥 시인 유고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에 실린 시 ?여분의 사랑?은 시간의 난폭을 살아야 하는 사랑의 운명을 애절히 읊고 있다. 같은 곳에 머물며 서로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간이 ‘백날의 고통’이 된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일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 시간으로서의 ‘백날’보다 더 긴 시간이고, 서로에게 지워질 수 없는 기억의 뜨거운 응축이다. ‘나의 여생’이 ‘저 사람’ 에게 ‘상처’가 될 것을 알기에 자신은 ‘벌써 죄인’이 되었다는 그 쓰린 마음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심연이다. 그럼에도 “막무가내인 저사람”의 사랑이 있었기에 ‘백날’을 함께 살 수 있었고, 그 ‘백날’의 시간을 자신의 모든 ‘일생’으로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여분의 사랑이 품고 있는 고귀함과 숭고함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결코 앗아갈 수 없는 게 사랑의 의지다. 막무가내로 다가가는 사랑이 있기에 모든 사랑은 시간의 불가항력을 뚫고 영원히 기억된다. 역설적이지만, 유한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우리의 삶이다. 여분의 사랑을 알 때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는 마지막 구절이 더없이 아프고 찬란해 보인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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