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19. 전남 담양 ‘소쇄원’

호남 명유·묵객들의 ‘힐링 사랑방’

초가정. 대봉정(待鳳亭) / 봉황을 기다리는 초가 정자다. 용과 봉황은 고귀한 신분의 상징이니 왕을 뜻한다. 소박한 초가에서 존귀한 봉황을 기다린다는 설정이 역설적이다. 멀리 은거해 있으면서도 왕이 정신 차리고 자신을 다시 찾기를 기다리는 은거 처사의 마음의 일단이 드러나는 듯하다. 조선조 제대로 공부한 사림 대부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편, 생각하면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글 읽어 경세제민의 뜻을 세운 사람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을 게다.
초가정. 대봉정(待鳳亭) / 봉황을 기다리는 초가 정자다. 용과 봉황은 고귀한 신분의 상징이니 왕을 뜻한다. 소박한 초가에서 존귀한 봉황을 기다린다는 설정이 역설적이다. 멀리 은거해 있으면서도 왕이 정신 차리고 자신을 다시 찾기를 기다리는 은거 처사의 마음의 일단이 드러나는 듯하다. 조선조 제대로 공부한 사림 대부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한편, 생각하면 시대와 나라를 막론하고 글 읽어 경세제민의 뜻을 세운 사람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을 게다.

보길도의 윤선도나 다산 초당의 정약용은 명문가의 준재니 별로 궁금할 게 없었다. 소쇄원은 달랐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무슨 돈이 있어 대대로 신선놀음 하고 사는지 궁금했다. 소쇄원은 조선 중기 문인인 양산보라는 약관 열일곱 청년이 구상해 10년 만에 지었다. 열다섯에 상경해 조광조의 제자가 되고, 열일곱에 문과에 급제하나 나이 적다고 합격장을 받지 못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열일곱에 출세를 접고 은거를 결심하고 당호까지 ‘소쇄’라 정했다니, 여간 조숙한 인물이 아니다. 화순 유배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은 중죄인 조광조를, 낙향해 있던 전 교리 양팽손이 찾았다. 조광조의 제자인 재종동생 소쇄 양산보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스승이 죽자 양산보는 소쇄원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여러 고을 수령을 지낸 재력 있는 장인 김윤제로부터 크게 한 몫 떼 받았다. 김윤제는, 당시만 해도 순수했던, 집안이 몰락해 오갈 데 없던 소년 정철을 거둬 먹이고 가르친 품 넓은 관후 장자였다. 인허가와 인력 자재 공급은 내외종 형 전라도 관찰사 면앙정 송순의 지원을 받았다.

소쇄, 씻은 듯 맑고 깨끗하다

여름 소나기가 대숲 두드리는 소리

바람에 이 댓잎 흔들리는 소리

소쇄, 씻은 듯 맑고 깨끗하다, 중국 남북조 때 공치규(孔稚圭)의 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이다. 소리 내 읽어 보라. 무더운 여름 한줄기 소나기가 대숲 두드리는 소리, 한 자락 바람이 댓잎 흔드는 소리 같지 않은가? 문득, ‘한자는 표의문자’라는 언어학에 ‘아니, 표음문자!’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다.

夫以耿介拔俗之標(부이경개발속지표) 무릇 지조와 절개는 세속을 뛰어넘고

蕭灑出塵之想(소쇄출진지상) 마음은 맑고 깨끗해 홍진을 뛰어넘으며,

度白雪以方潔(도백설이방결) 몸은 흰 눈을 갓 건너온 듯 결백하고,

干靑雲而直上(간청운이직상) 뜻은 푸른 구름 넘어 바로 하늘에 다다르니

吾方知之矣(오방지지의) 나는 은자가 그런 것이라 믿었다.

스케일도 커서 정자 8개를 세우고 나무와 꽃, 귀한 풀을 22종류나 갖춰 심으니, 실의에 찬 호남 명유와 묵객에게는 더없는 힐링 공간이요 문화 살롱이었다.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규암 송인수, 미암 유희춘, 청련 이후백, 태헌 고경명…. 무지한 자들은 소쇄원을 자주 송강 정철과 연결하나, 소쇄원을 드나들던 호남 선비 천 명이 기축옥사 때 주심관 정철의 편파적 판정으로 죽어나간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소쇄원담 / ‘소쇄처사양공지려’라 쓰여 있다. ‘소쇄처사 양공’은 소쇄공 양산보를 지칭하고, ‘지려’는 ‘...의 소박한 집’이란 뜻이다. 담안의 건물 제월당이 장주의 생활공간임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소쇄원담 / ‘소쇄처사양공지려’라 쓰여 있다. ‘소쇄처사 양공’은 소쇄공 양산보를 지칭하고, ‘지려’는 ‘...의 소박한 집’이란 뜻이다. 담안의 건물 제월당이 장주의 생활공간임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 소쇄원, 호남 명유의 문화 살롱,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사랑

공부는 이쯤 하고 이제 몸으로 즐길 때. 울창한 대숲이 끝나고 소쇄원 들어가는 무지개 다리 홍교는 속세와 선계의 경계다. 거기 시멘트를 덕지덕지 붙인 천박은, ‘동인백정’ 정철을 소쇄원에 갖다 붙인 무지와 쌍벽을 이룬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면 대봉대(待鳳臺), 봉황을 기다리는 정자다. 임금을 상징하는 봉황을 초가에서 기다린다는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소쇄원 48영’을 쓴 김인후를 빼고 소쇄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속된 말로 앙꼬없는 찐빵이다.

하서 김인후는 경상도에 퇴계라면, 전라도에 하서라, 호남 유학의 태두다. 벼슬은 낮아도 대학자에 문장가로 인종의 두터운 총애를 받았고 조경도 일가견 있었다. 양산보와 일찍부터 교유가 있었고, 나중에는 딸을 양산보의 차남 양자징과 맺어준다. 인종 붕어 후 낙향해 소쇄원을 드나들며 시와 글을 짓고 썼다. 비운의 왕 인종와의 신분 떠난 우정은 후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오방색 담장에 애양단(愛陽壇)이 보인다. ‘애양’ 볕을 사랑한다. 기축옥사로 제자를 몽땅 잃고도 임금에 대해 ‘구름 낀 볕뉘도 쬔 일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라 읊은 남명 조식의 심사가 애달프다. 원래 애양은 효를 상징하는 ‘효경’의 표현이니, 농암 이현보가 94살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려고 안동 도산의 집에 애일당을 들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곡문(五曲門), 주돈이가 머물던 구곡(九曲)에 대한 겸양인가? 오방색 담장 아래 물이 다섯 번 굽이치는 수구다. 공간은 나누되 물은 끊지 않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보여주는 한국 원림철학의 정수다. 오곡문을 지나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계곡을 사이에 두고 광풍각과 제월당이 마주 서 있다.

가을 광풍각 / 단풍이 곱게 물든 광풍각(光風閣) 광풍각은 직역하면 ‘밝은 바람 누각’이다. 바람이 밝다, 흔치 않은 표현이다. 한자를 보기 전에는 광풍(狂風)인 줄로만 알았다. 바람을 묘사하는 표현은 순풍과 역풍, 미풍과 광풍, 삭풍과 훈풍, 춘풍과 추풍 등 다양하지만 대부분 촉각이나 청각과 연결시키는 표현들이다. 이처럼 바람을 밝고 어두운 시각과 연결시키는 표현은 흔치 않다. 원래 광풍제월이라는 표현을 쓴 남송의 황정견의 놀라운 표현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가을 광풍각 / 단풍이 곱게 물든 광풍각(光風閣) 광풍각은 직역하면 ‘밝은 바람 누각’이다. 바람이 밝다, 흔치 않은 표현이다. 한자를 보기 전에는 광풍(狂風)인 줄로만 알았다. 바람을 묘사하는 표현은 순풍과 역풍, 미풍과 광풍, 삭풍과 훈풍, 춘풍과 추풍 등 다양하지만 대부분 촉각이나 청각과 연결시키는 표현들이다. 이처럼 바람을 밝고 어두운 시각과 연결시키는 표현은 흔치 않다. 원래 광풍제월이라는 표현을 쓴 남송의 황정견의 놀라운 표현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밝은 바람 광풍각은 독서 공간이요, 비 갠 날 달 제월당은 생활공간이다.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 如光風霽月) 마음이 맑고 깨끗하기가 밝은 바람과 비 갠 날 달 같다. 소동파와 쌍벽을 이뤄 ‘소황’(蘇黃)이라 불린 남송의 대시인 황정견이 성리학의 아버지 주돈이를 평한 데서 유래한 당호요 원림이름이다. 소쇄원이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중수한 3대 장주 손자 양천운도 계당상량문에 주돈이의 무이를 언급했다. 이처럼 소쇄원 역대 장주들은, 퇴계 이황 선생만큼이나 매사에 주돈이를 의식했다.

양산보 가문은 일본과 철천지원수다. 정유재란 때 소쇄원이 파괴되고, 2대 장주 양자징의 아들딸 가족이 왜군에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손자녀들은 끌려갔다. 300년 뒤 일제는 다시 소쇄원 앞에 ‘신작로’를 내고, 정자는 3개만 남기고 허물어버렸다. 조선 영조 때 제작된 소쇄원 목판도에 만평 넘게 묘사되던 원림은, 천 평 남짓으로 쪼그라들었다. 축소하고 훼손해도, 심지어 일본 오사카에서 심사했어도, 소쇄원은 1992년 세계정원박람회 대상을 차지했다.

 

제월당 / 제월당(霽月堂) 천정에 붙은 편액들. 서로 마주 보는 긴가로 편액 두 개가 유명한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이다. 오른쪽 편액, 오른쪽 끝 아래에 ‘하서 김인후 48영’이라 쓰여 있다. 네 글짜의 소제목 아래 오언절구가 하나씩 붙어 있다. 후에 하서 선생의 48영을 하나씩 모두 소개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김구철
제월당 / 제월당(霽月堂) 천정에 붙은 편액들. 서로 마주 보는 긴가로 편액 두 개가 유명한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이다. 오른쪽 편액, 오른쪽 끝 아래에 ‘하서 김인후 48영’이라 쓰여 있다. 네 글짜의 소제목 아래 오언절구가 하나씩 붙어 있다. 후에 하서 선생의 48영을 하나씩 모두 소개할 기회가 오기를 기대한다. 김구철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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