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대국의 야심과 소국의 자존심

국가 지도자가 전쟁에서 밀리면 갈 곳이 없고, 영토 문제에서 양보하면 설 곳이 없다. 로마를 지배하고 싶었던 폼페이우스부터 청나라 말기 북양대신 리훙장까지 생생한 역사가 말해준다. 영토 이슈는 국가이익의 차원을 넘어 한 나라의 자존의 영역이기도 하다.

1787년 미합중국 헌법이 만들어진 이후 232년이 지났다. 미국이 약 2세기 동안 걸어온 모습을 보면 인색하게 표현해도 경이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와 민족들이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측면도 있다. 미국의 팽창 과정을 보면 자못 흥미롭다. 몽골 제국이 한 세기 만에 급격히 영역을 넓혀가던 모습이 그려진다. 2천여 년 전 로마가 속주와 자치주를 넓히면서 제국을 팽창시켜 나간 시기도 연상된다.

미국은 건국 초기 동부의 13개 주에 정착한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전을 불사한 전쟁과 상대방 국가의 국내 사정을 십분 활용한 외교를 통해 영토를 확장해 왔다.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때는 현 미국 영토 3분의 1가량이나 되는 중부의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로부터 매입했다.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것 못지않게 영토 매입은 미국의 이익에 중요했다. 19세기 중엽에는 멕시코로부터 텍사스와 뉴멕시코 지역, 그리고 캘리포니아 일부까지 획득했다. 그 직후에는 슈어드 국무장관의 기지로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였다.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덴마크 방문을 연기해 화제가 되고 있다. 국가원수의 공식 외국방문은 상당한 시간을 두고 합의와 준비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취소나 연기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당연히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덴마크 영토인 그린란드 매입 문제를 놓고 미국과 덴마크 양국 간에 신경전이 일고 있는 것이다.

북유럽의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이름과 달리 실제 가 보거나, 위성사진으로 보더라도 동토는 별로 없고 아름다운 경관의 녹색이 많이 있다. 국가의 이름이 역설적으로 명명되었다. 북극 지역으로 분류되는 그린란드는 명칭과 전혀 다르게 녹색은 보이지 않고 얼음만 두껍게 뒤덮여 있다. 그린란드 도처에 미군 기지가 있을 것이라고 누구든지 상상할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냉전시기의 힘을 재현하려는 러시아의 푸틴도 견제해야 하고, 세계 도처로 시선을 넓히는 중국의 예봉도 꺾어야 한다.

미국이 알래스카를 매입할 당시, 가치 없는 툰드라 지역이라고 하면서 내부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당시 외교수장 슈어드는 미래가치에 투자했고, 720만 불에 매입한 알래스카는 오래지 않아 천연자원의 보고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략적 가치도 발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어리석은 슈어드’로 비웃음까지 받았던 1860년대의 미국 외교수장이 20세기가 지나면서 지혜로운 우리의 국무장관으로 바뀌어 갔다. 반전이 된 외교 일화가 전해 오면서 지금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만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슈어드의 스토리를 모를 리 없는 트럼프와 백악관의 보좌진들은 전략적 이유로 미래가치에 투자하려 하고 있다. 다만, 지금의 덴마크는 19세기 중엽의 제정 러시아가 아니어서 선뜻 달러 한 자루에 한때 북유럽의 맹주였던 자신들의 자존심을 교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린란드를 사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표현한 트럼프식의 제안에 덴마크 총리는 황당하다(absurd)는 한 마디로 응수하면서 불쾌감을 바로 드러내었다. 외교가에서는 부드러운 외교화법이 와인같이 애용되지만, 상대를 자극하는 직설법이 난무하는 때도 종종 있다.

노골적인 대국의 야심 앞에 소국의 자존심이 갈대처럼 흔들린다.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던진 한마디가 스산한 가을바람처럼 기억의 한 자락을 스친다. “강대국은 원하는 일을 하고, 약소국은 그저 감내할 뿐이다.”

최승현 경기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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