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암기식 교육이 무슨 죄?

흔히들 암기식·주입식 교육은 악(惡)이고 토론식·참여식 교육이 선(善)이라고 말한다. 암기란 배운(學) 후에 익혀(習)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필요할 때 저절로 머리에 떠오르는 상태를 말한다. 암기한다는 영어 표현 중에 ‘learn by heart’가 있다. 암기하는 것을 왜 가슴으로 배운다고 표현했을까? 가슴으로 배운다는 것은 머리로 분석하고 이해하며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필요한 순간에 튀어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지식, 작품, 행동을 적응무의식 상태에서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암기의 주요 목적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 회갑 전후의 한국 사람들치고 어렸을 때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못 외운다고 벌서고 혼난 기억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국민교육헌장’부터 시작해 ‘기미독립선언서’, 너무나 긴 김춘수의 시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 등등. 중국 교육부가 2011년 발표한 지침 중에 ‘의무교육 어문과정 표준’이라는 문건이 있다. 이 문건에는 학생들에게 암기하도록 하는 작품 115편이 있다. 논어, 맹자, 출사표뿐 아니라 한시가 대거 포함돼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 몇천 년 전 성인의 지혜나 시인의 감성은 도외시한 채 입으로 줄줄 외우게끔 시킨다. 입만 열면 ‘토론식 교육’을 외치는 요즘 우리 일부 교육자들이 볼 때는 침 튀면서 격노할 일이다.

노벨상을 받은 중국의 물리학자 양전닝(楊振寧, 1922~)은 이런 교육 방식에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어린 시절에는 뜻도 모르고 외웠지만 살면서 그때 외웠던 구절들이 생각나고 곱씹게 되고 새로운 경계가 열리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암기식 교육의 폐해만 애써 볼 게 아니라 그 효용성과 장점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암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가 퍼지면서 학교에서도 외우는 활동을 시키지 않고 학생들도 점차 외우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다. 노래방에서 모니터를 보지 않고 노래를 외워 부를 수 있는 곡이 몇 개나 될까.

비단 암기식 교육뿐 아니라 한자 교육 폐지니, 자사고나 외고의 폐교니 하면서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는 정치판보다 심한 이념 전쟁을 보고 있다. 아기 욕조 물이 더럽다며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추태가 아닐 수 없다. 암기 능력은 학습역량을 강화시키고 높은 수준의 지적 단계에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참여식이니 토론식이니 하는 교육도 중요하겠지만 글자는 읽어도 글은 읽을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문맹(文盲)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우리는 부숴버리기는 쉬워도 그것을 다시 만들어내기는 너무 어렵고,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을 인정하는 아량이 부족하다. 제대로 읽고 쓰고 외우는 기본을 무시하는 교육은 사상누각이다. 집집마다 낭랑한 목소리로 글을 낭독하고 외우는 아이들이 많아야 살길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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