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임진왜란 때 잡혀간 朝鮮 도공들

17세기까지 유럽은 도자기를 굽는 가마의 온도를 1천200도 이상 높이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1천200~1천400도에서 구워 내는 일본 아리타(有田), 그리고 사츠미에서 생산되어 유럽으로 건너 온 도자기들은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 도자기들은 특히 식기, 접시, 찻잔 등에 예쁜 무늬와 문양까지 그려내니 수요가 폭발적일 수 없었다.

런던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는가 하면 당시 유럽과 아시아를 주름잡던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는 일본 나가사끼에서 무한정 도자기를 수입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팔았다.

따라서 일본은 도자기의 유럽 수출로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고 이 돈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도자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의 도공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때 잡혀간 조선 도공들은 400명이나 되는데 노예상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노예 사냥을 하듯 일본은 우리 도공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간 것이다. 그리고 영주들은 전리품을 나누어 갖듯, 서로 많은 도공들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들 도공들 중에서도 충남 공주 반포면 학봉리에서 잡혀간 이삼평(李參平)과 전라도에서 잡혀간 심수관이 가장 뛰어난 도공들이었다.

이들이 일본에 오기까지 그들의 밥그릇은 왕대나무 자른 것이나 나무를 잘라 속을 파낸 것 등이었고 사발 같은 도자기로 된 것은 일반화되지 못했다. 조선이나 중국에서 가져간 얼마 안되는 자기류는 높은 신분의 집에서나 사용했던 것.

그러나 이삼평 등이 일본에 가자마자 도요를 만들어 도자기를 구어낸 것은 아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백토가 없었다. 조선에서 가져간 백토가 조금 있었으나 그것은 새발의 피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20년을 흙을 찾는 일에 소비했고 영주들은 전국을 훓어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이삼평이 마침내 찾아낸 곳이 사가현에 있는 아리타.

이삼평은 이곳에 도요를 만들고 일본이 그토록 갈망하던 자기를 구어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1616년…. 그러니까 1616년은 일본 도자기의 출생년도가 되는 것이다.

이삼평은 잡혀 오기전 계룡산에서 만들던 철화분청사기를 정성들여 세상에 내놓았으며 그 은은하고 질박한 멋스러움에 모두들 탄성을 올렸다.

나아가 그 분청사기에 아름다운 문양을 넣어 유럽인을 매혹시킨 것이다.

이러니 일본인들이 이삼평을 일본 ‘도자기의 신(神)’이라는 뜻으로 ‘도신(陶神)’이라 불렀고 실제로 그를 신격화하여 ‘신사(神社)’까지 만들었다.

정말 이삼평이 시작한 아리타의 도자기 작업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400년 이어 오면서 인구 2만의 이 조그만 도시에 도요가 1천400개나 됐고, 백토를 캐느라 산 하나가 거의 사라질 정도니 짐작이 간다.

그리고 365일 세계 여러나라에서 오는 관광객으로 붐비고 골목 마다 온통 도자기 가게다.

그러니까 일본은 삼국시대, 특히 백제로부터 불교에서부터 천자문과 논어, 옷감 염색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문화로 눈을 떴고 임진왜란 때 잡혀 간 조선 도공들로 하여 명치유신의 큰 혜택을 받았는데 지금에 와서 반도체 핵심기술로 우리의 급소를 찌르는 것은 정말 역사의 배신이 아닐 수 없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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