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8. 이천 어재연 생가

1871년 미군 함포에 맞선 조선말 ‘비운의 장군’

초가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웅장한 석축 기단 위에 조성한 사랑채. 경사가 심한 산록에 집을 짓다 보니 석축을 높이 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중이 큰 기와집과는 달리 기초가 완전한 수평은 아니고 약간 기울어 있다.
초가집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웅장한 석축 기단 위에 조성한 사랑채. 경사가 심한 산록에 집을 짓다 보니 석축을 높이 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중이 큰 기와집과는 달리 기초가 완전한 수평은 아니고 약간 기울어 있다.

이천(利川), ‘큰 강을 건너면 이로우리라[利涉大川]’. 경기도 이천시 율면(栗面). 충북 음성군 삼성면, 생극면과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이천시의 경계가 맞닿은 지역이다. 옛날에는 밤이 많이 났던 모양인데, 너른 들과 청미천, 석원천의 풍부한 물로 예로부터 맛좋기로 소문난 이천쌀의 주산지다. 멀지 않은 음성군 삼성면 마이산(472m)에는 망이산성이란 성터가 있는데, 면적이 10만㎡나 되고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어 비옥한 곡창을 놓고 벌어진 3국 시대부터의 치열한 쟁패전을 짐작할 수 있다. 자연부락명 돌원인 율면 산성1리, 함종 어씨(咸從 魚氏) 집성촌이 있다. 시조(始祖)는 고려 명종 때 때 난을 피해 도래한 오늘날의 중국 섬서성 출신의 어화인(魚化仁)이라 한다. 함종, 생소한 지명이라 사전을 찾아보니 평안남도 증산군 함종리라 돼있다. 어씨 집성촌 맨 오른쪽 안 깊은 산자락에 국운이 기울어가는 조선말, 비운의 장군 어재연의 생가가 있다.

 소박하지만 웅장해 보이는 초가지붕

소박한 초가라지만, 경사지를 평탄하게 하려고 석축을 높이 쌓은 전면은 웅장하기까지 하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이렇게 높은 석축 위에 놓인 초가를 본 적이 없다. ‘ㄱ’ 자형의 안채와 ‘ㅡ’ 자형의 사랑채와 광채가 안뜰을 둘러싼 튼 ‘ㅁ’ 자형이다. 안채가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문 바로 안쪽에 짧은 내외담이 있다. 사랑채도 안채도 돋운 석축 위에 지었으니, 초가집으로는 상당한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건물마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각주를 세웠는데, 단정하며 자연스럽다.

1칸 대청, 2칸 온돌방, 1칸 부엌의 사랑채는 2고주, 5량 구조로 툇마루를 달았다. 툇마루에 앉아 7월의 땡볕을 피한다. 초가 그늘에 들어서니 에어컨을 튼 것처럼 시원하다. 단열, 초가의 최대 장점이겠다. 사랑채는 외양간, 창고로 구성된 행랑채와 연결된다.이 집에서는 반가의 특징이라 할 누마루도 머름도 4분합 들창문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웅장해도 초가는 역시 초가라, 보도 기둥도 서까래도 기와집들보다 훨씬 가늘다. 볏짚으로 이은 초가지붕의 하중은 기와에 비할 바 없이 가볍다. 기와

집도 기와집 나름이라, 1벌, 2벌, 3벌로 재력에 따라 기와 덮는 방식이 달랐다. 궁궐이나 사원, 우리가 기억하는 고택은 3벌 기와가 보통으로, 기와를 3겹으로 얹었으니 하중이 어마어마했다. 보, 도리, 기둥, 서까래 모두그 하중을 떠받칠 만큼 든든해야 했다.

광채 오른편에 붙은 문간.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시선을 차단하는 짧은 내외담이 보인다
광채 오른편에 붙은 문간. 안채가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시선을 차단하는 짧은 내외담이 보인다

 조선 말의 국제 정세와 약소국 장수의 운명

미군 함정이 강화도로 침공해온 신미양요(1871) 당시 조선군은 용기(정확하게는 만용)뿐, 무기와 전술에서 미군의 상대가 아니었다. 미군은 함정 5척에 병력 1천230명, 조선군은 보병 300명. 먼저 대포. 조선 대포는 철환을 쏘는 수준인데, 미군 함포는 목표물을 맞히면 화약이 폭발하니 파괴력과 살상력에서 비교되지 않았다. 다음 소총. 조선군의 화승총은 임진왜란 때와 별차이 없는 전장식으로 상반신을 드러내고 장전하는데, 미군 소총은 후장식으로 몸을 숨긴 채 장전하고 연속 사격이 가능했다. 서양에서도 후장식 드라이제 소총으로 무장한 프러시아 군이 전장식 머스켓 소총의 오스트리아 군에 압승한 1866년 보오 전쟁의 선례가 있다. 유일한 희망은 근접 백병전이었는데, 미군의 신체 조건이 월등했으니….

‘조선군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강력히 싸우다가 죽는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당시 상륙 미군 슐레이 소령은 기록했다. 사망자 243 대 3, 조선군은 용맹했으나 어재연 대장 형제가 전사하고 대장기 ‘帥’자기마저 빼앗겼다. 참담

한 패배였다. 가로 415cm, 세로 435cm의 삼베 ‘帥’자기 오른쪽에 일부를 잘라낸 흔적이 있다. 죽인 소의 귀를 잘라 전리품 삼는 투우사의 전통처럼. ‘帥’자기는 미국인인 토마스 듀버네이 한동대 교수의 주도로 2007년 미 해군사관학교로부터 임대받아 돌아왔다. 듀버네이 교수는 카터, 클린턴, 부시 등 미국 대통령에게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반환을 성사시켰다 한다. 후손된 이로 한심하고, 부끄럽기 한량없다.

‘帥’자기와 함께 러시아 군함 바랴크기가 떠오른다. 1904년 조선 영해에서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러일 전쟁, 당시 바랴크함의 러시아군은 배를 넘겨주기보다는 자폭을 택했다. 그 깃발을 일본군이 승전 기념으로 인천에 보관하다 놓고 갔다. 국권을 잃은 쓰라린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그 깃발을 보관해야 하는 것 아닐까?

 무너진 국권과 지배 엘리트의 책임

한일합병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잘못된 국제정세관과 쇄국정책이 빚은 참사로 기억된다. 또는 조선이 국제사회의 변화에 대응할 역량이 없었다는 숙명론

으로 일제의 병탄을 합리화한다.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 대륙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명을 떠받들고 청을 멀리하자고 주장한 집권 세력의 잘못된 정세관이 조선 멸망의 근본 원인이다. 당시 수구 집권 세력은 명나라 황제를 숭상하는 만동묘를 만들고, 힘도 없으면서 택도 없이 ‘북벌론’

을 주장했다. 척화파-노론에서 세도 정치-친일파로 이어지는 집단은 정치경제 권력과 학문과 문화 권력까지 독점하고 국력을 철저하게 훼손했다. 그 대표는 세거지를 서울 장동으로 옮긴 안동 김씨[壯洞金氏]였다.

향리에 남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영·호남, 경기의 선비들은 남인으로 산림에 묻혀 책을 읽고 후진을 길렀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먼 훗날을 기약하면서. 정약용, 이익 등 실학자들도 대부분 남인이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한국의 서원’에 대해 젊은이들이 부정적인 것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부정적 시각자체가 바로 노론-세도정치-친일파-수구 반동으로 이어지는 ‘권문세가 출신’의 의도라는 것을 왜 모를까?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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