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5. 파주 자운서원

율곡이이 학문·지혜 담긴… 조선초 사회개혁의 진앙지

많은 이가 임진왜란 때 화석정을 태워 선조가 임진강을 건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화석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현실적으로도 화석정은 높은 지대에 있고 산길이 험해 비오는 밤에 올라가기는 버겁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왜구가 목재를 쓸 수 없도록 임진강 나루청 건물을 태웠다’고 썼다.
많은 이가 임진왜란 때 화석정을 태워 선조가 임진강을 건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화석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현실적으로도 화석정은 높은 지대에 있고 산길이 험해 비오는 밤에 올라가기는 버겁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왜구가 목재를 쓸 수 없도록 임진강 나루청 건물을 태웠다’고 썼다.

안동 도산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대표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다. 서원은 지역 사회가 설립한 사립학교로, 제사와 강학, 풍속순화와 정치적 여론 형성도 맡았다. 어느 왕조를 막론하고, 훈척(勳戚, 공신과 왕실 친인척)은 권세를 믿고 부패와 불법이 잦고, 행정 관리에 어둡다. 그러니 왕은 훈척을 국정에서 배제하고, 깨끗하고 실력 있는 테크노크라트를 중용하고자 한다. 조선 전기 때도 그랬다. 사림(士林)은 체계적 독서를 통해 실력을 기른 테크노크라트였지만, 권모술수가 부족해 4대 사화(士禍)를 잇따라 당하며 패퇴했다. 사림이 실력을 배양하고 힘을 모아 정치 세력으로서 체계화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은 서원이었다. 결국, 사림이 조선의 정치권력을 잡고 정치 사회를 개혁하니 서원의 기여는 재평가돼야 마땅하다.

자운서원은 조선 광해군 때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앙하기 위해 파주 자운산 기슭에 지역유림이 창건했고, 효종이 ‘자운’ 현판을 하사하면서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사액서원은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런던대 등 유서깊은 유럽 대학의 킹스칼리지(King’s College)격이다. 자운(紫雲), 붉은 노을, 아마 석양이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날 석양을 즐길 여유까지는 없었지만, 자운서원 넓은 안뜰에는 잔디가 깔렸고 나무 그늘과 연못이 있어 넉넉하고 아름다웠다. 선현의 유적에 대한 거리감을 없애는 데는 아주 좋으니, 자녀와 함께 나들이할 장소로 전혀 손색이 없다.

‘조상 묘소는 위에 크게, 자손은 아래에 작게’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율곡 선생의 묘소는 가족 묘지 가운데 가장 위쪽에 가장 크게 조성돼 있다. 한 참배객이 선생의 묘소에 예를 올리고 있다
‘조상 묘소는 위에 크게, 자손은 아래에 작게’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율곡 선생의 묘소는 가족 묘지 가운데 가장 위쪽에 가장 크게 조성돼 있다. 한 참배객이 선생의 묘소에 예를 올리고 있다

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해서, 앞에 강학 기능을 담당하는 강당과 동서 양재(기숙사)를 두고, 뒤에 묘향(廟享, 제사)을 위한 사당을 두어 선현을 모셨다. 서원 입구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우뚝하다. 2단 받침돌의 아랫단은 돌 4장을 짜맞추고, 윗단은 구름과 연꽃무늬를 새겨 호화롭다. 묘정비 비문은 당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김수증, 비명은 당대 명필 김수항이 썼다. 수령 몇백 년은 족히 될 느티나무 두 그루가 지키는 문성사(文成祠)는 팔작지붕의 6칸 건물이다. 율곡을 주향(主享)으로, 숙종 이후 수제자 사계(沙溪) 김장생과 남계(南溪) 박세채가 종향(從享)으로 모셔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9대 서원 가운데 충남 논산 돈암서원이 김장생을 주향으로 모신다.

율곡 선생은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했다. 대제학, 대사헌, 호조·병조·이조판서를 지내며, 십만 양병설, 대동법 시행, 사창 설치 등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개혁가였다. 임금과 국가 경영과 치세의 도리를 주고받은 <동호문답(東湖問答)>, 임금에게 올린 만 글자의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성리학 요체를 정리한 <성학집요(聖學輯要)>, 학문에 입문하는 미래 세대를 위한 <격몽요결(擊蒙要訣)> 등의 저서를 썼다. <시폐론(時弊論)>, <시무론(時務論)>등 현실과 타이밍(時)을 강조한 저서가 많다.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며, 퇴계가 영남 사림의 대표며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한 데 반해, 율곡 선생은 기호학파의 대표로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했다. 퇴계는 지방 사림의 교육과 민중 교화에 더 관심이 많았고, 율곡은 현실 정치와 행정에 깊숙이 관여한 차이가 학설에도 반영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서원 반대편 기념관, 선생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며 선조에게 올린 글, ‘시무육조(時務六條)’를 만난다. 나라에 가장 시급한 여섯 가지를 뽑아 올린 것인데, 첫째가 ‘임현능(任賢能)’, ‘(문벌 신분에 얽매지 말고) 어질고 일 잘하는 사람을 쓰라’는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던 YS의 말이 떠오른다. 나도 글쓰는 사람인지라 공부하는 자세를 정리한 격몽요결(擊蒙要訣) 지신장(持身章)의 첫 구절을 되뇌어 본다. ‘족용중(足容重) 수용공(手容恭)’ 발은 무겁게, 손은 공손하게. 기념관에서는 선생의 묵적(墨跡)과 행적을 요약 정리한 동영상도 상영한다.

서원 역사를 알리는 묘정비(廟庭碑). 비문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예서체의 글씨는 김수증(金壽增), 비명(碑銘)은 당대 권신(權臣)이며 명필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서원 역사를 알리는 묘정비(廟庭碑). 비문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예서체의 글씨는 김수증(金壽增), 비명(碑銘)은 당대 권신(權臣)이며 명필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에는 율곡이 은퇴 후 처가인 해주에서 대장간을 차려 호미와 괭이를 만들어 팔았다 한다. 먼저 죽은 맏형 가족을 데려오고, 자리 잡힌 후에는 동생 가족, 가까운 친척 등 모두 100여 명의 대가족을 이끌었다 한다. 천민 출신이라도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면 주저 없이 교류했던 사실도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기호학파 예론(禮論)을 이끈 구봉 송익필이 바로 천민 출신 친구였으며, 선생은 서출에게도 재산을 고르게 나눠주었다 한다.

선생은 ‘실천하는’ 정치인이요, 학자였던 것이다. 기념관과 자운서원을 양쪽에 두고 산자락에 가족묘가 있다. 어머니 신사임당과 아버지 이원수 공의 합장묘를 비롯해 형 이선, 여류 화가로 이름을 떨친 누나 매창 부부, 맏아들 이경림, 큰손자 이제 부부 등 모두 14기가 정답다. 선생 묘소가 가장 크고 가장 위에 있어 이채롭고, 누나 부부와 그 시부모 묘소가 특이하다. 가벼운 산책을 겸한 참배를 권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나루 강기슭 남쪽은 천연의 성 모양이다…. 참으로 가히 지킬만한 땅이며, 성을 두기 딱 좋은 곳이다. 이제까지 성을 쌓지 않았으니 얼마나 한스러운 일인가?”라고 탄식했다 (臨津渡…. 江岸南麓 如天作城形……. 眞可守之地 而不得不置城處也 然至今不築城 切可恨也). 바로 그 자리 화석정(花石亭)은 지을 당시 주변에 기이하고 진귀한 화초와 소나무, 괴석이 많았다 한다. 화석(花石)은, 중국 당나라 재상 이덕유의 별장 평천장(平泉莊) 기문(記文)에서 따왔다.

율곡 사후 8년 뒤 임진년, 왜군이 쳐들어오자 선조가 비 내리는 야간에 몽진(蒙塵)을 떠나게 됐다. 율곡이 전란을 예견하고 화석정 기둥에 기름을 칠해 뒀음을 누군가가 떠올리고 화석정에 불을 붙였고, 그 불빛으로 선조 일행이 임진강을 건너 피난을 갈 수 있었다 한다. 그러나 실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고, 선조를 수행했던 유성룡도 징비록(懲毖錄)에서, 화석정이 아니라 임진강 나루 건물을 태웠다고 기록했다.

 

선생의 묘우(廟宇) 문성사를 좌우에서 지키는 느티나무는 2012년 조사에서 수령이 400년을 훌쩍 넘긴 것으로 측정됐다.
선생의 묘우(廟宇) 문성사를 좌우에서 지키는 느티나무는 2012년 조사에서 수령이 400년을 훌쩍 넘긴 것으로 측정됐다.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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