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는 1974년부터 1984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분으로, 미술사학자이자 박물관 전문인이다. 선생의 유고 명저인 <무량수전 배홀림 기둥에 기대서서>(1994)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분이다. 오늘 이분이 말년에 사시던 집에 들렀다. 4호선 한성대입구 전철역에서 5-600미터쯤 걸어 올라가다가 왼쪽 골목길로 들어서 ‘최순우 옛집’이 그곳이다. 이 집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잠깐 이 동네 이야기를 하겠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을 나와 성북동쪽 길을 걷다 보면 아기자기한 가게들도 더러 있고, 정겨운 옛 풍경들이 눈에 띈다.
이 동네는 오래된 한옥들이 아직 군데군데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색적인 풍경이다. 성북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 바로 북쪽으로 군영이 있던 곳이이라 한다. 또 한양 양반들의 별장들이 더러 있던 곳이라 한다. 산과 계곡, 그리고 바위들이 많았던 곳으로 산세와 풍광이 좋으니, 풍수적으로도 좋은 곳인 모양이다. 지금은 주택들이 들어차 있어 바위들이 잘 보이지 않지만, 산길처럼 나있는 오래된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높은 축대들이 있는 곳이 있다. 몇십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축대에 삐져나온 바위들이 바위가 많았던 곳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 동네는 서울에서 아파트들이 들어오지 않은 몇 안 되는 곳이 되어 오히려 이런 것들이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동네 골목이 아직 살아있는 곳이다. 골목 곳곳에는 작은 화분과 큰 화분들에 꽃들을 심고 가꾸거나 가지나 고추, 상추 등 채소를 키워먹는 모습이 정겹다. 이 집은 문화적으로 보존가치가 높아서 시민성금으로 보존되는 공간이다. 이 집은 1930년대에 건축된 한옥이다. 낮은 산구릉에 지은 집이라 대문이 약간 오르막인 평지길에서 높게 위치해 몇 개의 계단을 올라가 들어가는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자마자 당시 사랑채여서 손님들이 머물렀을 것 같은 방이 왼쪽에 있는데, 작은 전시실로 꾸며져 있어 들어가 보니 눈에 띄는 문구가 있다. “남들처럼 고대광실이나 넓은 후원은 아니지만 나는 내 나름으로 좁은 뜰에 가지가지 산나물들과 조촐한 들꽃들을 가꾸면서 호젓하고도 스산한 산거의 멋을 즐겼고 남의 기름진 뜰이 부러운 줄을 모르고 살아왔으니 나에게는 이 산나무들과 들꽃들이 지닌 미덕이 그리도 컸다고 할 만하다.”
이 집 평면은 ‘ㄱ’자형 본체 건물과 ‘ㄴ’자형 사랑채 건물이 마주 보고 함께 있어 ‘ㅁ’자형을 이루는 집이다. 혜곡 선생이 머물며 그의 <무량수전 배홀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을 법한 안채의 서재는 뒤뜰과 안채 마당, 대문이 보일 수 있도록 양쪽으로 문이 나 있는 방이다.
이 집을 잠깐 들러보기 보다는, 이 뒤뜰에 앉아서 두어 시간 이상 앉아서 책도 보고 나무도 보고 들꽃들도 보고 그저 앉아 있어보아야 그 멋을 느낄 것 같다. 도심 속에 있지만 산속에 있는 것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즐긴 산거의 멋과 산나무들과 산꽃들이 지닌 미덕을 느낄 수 있기는 어렵더라도, 더없이 훌륭한 시간이 될 것이다. 나는 이곳을 사랑하게 됐다.
김원명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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