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라, 동지여! 낡은 세계가 너를 뒤 쫓고 있다.”
51년 전 세계로 퍼져 나간 68혁명은 냉전질서, 권위주의를 타파를 외쳤다. 68세대 젊은이들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했고, ‘닉슨 독트린’ 선언으로 아시아 지역에서의 냉전질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1989년 고르바초프와 부시는 핵무기 감축에 합의하고 냉전의 종결을 선언했다. 반면에 한반도는 21세기 밀레니엄 탈냉전의 시대에도 여전히 야만적인 냉전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냉전 갈등의 해소가 미래로 나가는 길임을 알기에 약속 없이 다음을 기약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민은 애가 타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정치권과 언론은 평화라는 가치와 공동의 이익에 대한 추구가 아닌 진영논리를 우선하며 이번 회담을 평가 절하했다. 마치 결렬되기를 바랐던 것처럼. 동창리 발사장 재건 징후 포착에 사실 관계, 의도 등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가짜 비핵화’, ‘가짜 평화’라며 연일 쏟아 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회담 첫날 김정은 위원장은 낡은 관행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다. “내 아이들이 평생 핵을 이고 사는 것 원치 않다”고 까지 말했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컸다. 그런데도 회담은 무산됐다.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볼턴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핵을 다 공개하라는 무리한 요구는 무장해제나 다름없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자신과 체제의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미국은 영변 핵시설 외에 우라늄농축시설과 핵탄두·미사일 보유량 신고, 대량살상무기(WMD) 폐기 등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핵 포기 합의에도 나토군의 지원을 받는 리비아 반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리비아의 카다피, 후세인 왕궁의 모든 시설의 사찰을 허용했지만 그것을 이용해 시설을 폭격한 사례를 속속들이 아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핵 포기는 백기 투항을 넘어 죽음이라는 인식이 각인됐을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해 보면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신중해야 한다. 과도한 욕심과 조급함은 일을 그르친다. 북한은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핵을 수단으로 위협하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더 위험한 수렁으로 빠져들 뿐이다. 미국은 볼턴의 리비아식 비핵화 해법으로 무장해제, 체제 붕괴를 바라서는 안 된다. 북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야겠지만 과도한 해석이나 국내 정치에 이용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낡은 시대의 유령들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려 냉전체제로 되돌아가려는 준동세력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비핵화는 과정이다. 북미는 70년 넘게 적대 관계였다. 과정 없이 결과 또한 있을 수 없고 발판 없이 한 방에 도약을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북미 간 신뢰를 축적하고 이익 공유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단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핵 포기를 결단할 수 있는 용기 또한 남북미 간 신뢰, 전 국민적 지지가 필수적이다. 신뢰는 대화를 먹고 자란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오현순 한국매니페스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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