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론] 우리에게 중국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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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은 무역이 아니라 향후 100년을 결정할 세계 패권경쟁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싸움은 트럼프가 그만둔다고 해도 끝날 것 같지 않다.

고대 아테네의 장군이었던 투기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아테네가 기존 강국 스파르타에 불러일으킨 두려움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2등국이 1등국을 치고 올라올 때 1등국은 공포에 빠지고 2등국은 억지로 핍박받는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결국은 전쟁이 터지고 만다는 심리의 함정이 ‘투기디데스 함정’이다. 

우리는 미·중의 무역전쟁을 보면서 20년간 지속된 과거의 미·일 무역마찰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고 50년 가까이 계속되다 결국 완패한 구소련과의 냉전체제 경쟁을 떠오르게 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이 딱 맞다. 새우치고는 우리 경제 규모가 크기에 왕새우 정도로 비유할 수 있으나 그게 그거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24%이고 이 가운데 79%가 중국산 완성품의 중간재이다.

 

당연히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경제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안보도 보통 일이 아니다. 문 대통령이 홀대를 받으면서까지 중국에 애정의 눈길을 보내나 시진핑의 거만한 눈빛이나 표정만 봐도 우리 편은 아니다. 트럼프나 시진핑은 서로 우리가 제 편이 아니라 상대방 편이라 생각하니 우리를 의심하고 믿지 못할 존재로 본다.

 

안보에서는 양다리 걸치다 패망한 나라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우리 대통령이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에 같이 하겠다고 비위를 맞춰도 현실은 냉혹할 뿐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우리를 대등한 국가로 본 적이 없다. 오죽하면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고 했을까. 살기 위해서 강자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강자가 우리를 우습게 보는 일과는 별개의 문제다.

 

세계의 리더가 되려면 군사력과 경제력 외에 인권과 문화의 힘, 설득력 있는 정치적 가치, 다른 나라에 대한 포용력을 갖춰야 한다. 국경선을 맞댄 이웃 나라와의 분쟁, 마윈 회장의 사퇴와 판빙빙 사건, 반정부 인권운동가들의 탄압에서 보듯이 중국은 세계의 리더국이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미국이라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중국에 비해서는 차원이 다르다.

 

국제 정치는 아무리 복잡한 이론을 내놓아도 결국 편 가르기 게임이다. 평화는 힘의 균형으로 이뤄지는 것이지 말로 약속한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님을 역사는 증명한다. 관대한 평화조약이나 협상은 곧이어 다른 전쟁을 수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힘이 부족할 때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과 힘을 합쳐야 산다.

 

1·2차 세계대전의 3가지 교훈이 있다. 첫째, 슬슬 밀리면 나중에 몽땅 잃는다. 둘째, 최강자 편에 서지 않는 국가는 망한다. 셋째, 설마가 꼭 사람 잡는다.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처칠의 말이 생각난다. “유화주의자(宥和主義者)란 자기는 맨 나중에 잡아먹히길 바라면서 악어에게 먹이를 주는 자다.”

 

한반도에 평화가 다 온 것처럼 오버하는 현 정부가 명심해야 할 말이다.

 

이인재 한국뉴욕주립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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