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32. 서오릉에서 숙종의 공과를 생각하다

‘강력한 왕권’ 수립… 영·정조 ‘문예부흥시대’ 주춧돌

명릉 전경. 정자각 오른편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과 인원왕후의 단릉이 보이고 있다.
명릉 전경. 정자각 오른편에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과 인원왕후의 단릉이 보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은 조선역사의 얼굴이다. 왕과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왕릉에 오롯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태조가 잠든 건원릉부터 27대 순종의 유릉까지 27분의 임금들을 모신 왕릉은 모두 조선 제일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효종이 묻힐 뻔 했던 명당은 사도세자가 차지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소를 천하제일의 명당에 모시면서 자급자족의 신도시 수원화성을 건설하여 문화군주로서의 정치력을 맘껏 발휘했다. 또한 우리는 흥선대원군이 부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여 고종과 순종을 배출했다는 일화를 알고 있다. 대통령을 지낸 이조차 조상을 명당에 모셨기 때문이라고 하니 명당은 여전히 ‘살아있는 신화’이다.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라는 말도 풍수와 관련되어 있다.

 

아쉽게도 명당을 신봉하는 문화는 공동체보다 내 조상, 내 부모, 내 가족을 앞세우는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라는 병폐와 닿아 있다. 그렇지만 성역이었던 조선 왕릉은 현재 공원화되어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명당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

 

■ 명릉에서 밝은 정치를 상상하다

총 44기에 이르는 조선 왕릉 가운데 동구릉과 함께 서오릉은 가장 여러 기의 왕릉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서오릉의 중심인 명릉(明陵)은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 같은 역사적 인물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와 숙종이 재위한 46년 동안의 정치사가 들어 있다. 따라서 화합과 협력의 새로운 역사를 써야할 우리 시대에 성찰해야할 역사의 교훈을 이곳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숙종(재위:1674∼1720)의 이름은 이순(李焞), 자는 명보(明普)이다. 1661년 8월 15일 현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1667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1674년 14세의 나이로 조선 제19대 국왕에 즉위하여 재위 46년이 되던 1720년에 승하했다. 숙종이 재위했던 시기는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 온 붕당정치가 절정으로 치달아 정치가 파탄이 나던 시기였다. 숙종의 정치적 특징은 ‘환국(換局)’이다. 환국정치로 왕권강화에 성공했으나 목숨을 건 정쟁과 여기에서 비롯된 공작정치의 폐해가 엄청났다. 당대는 물론이고 그의 뒤를 잇는 경종, 영조, 정조대는 물론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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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에서 바라본 명릉

즉위 초 예론에서 승리한 남인이 정권을 잡았으나 1680년 경신환국으로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했다. 1689년 희빈 장씨가 낳은 왕자(경종)에 대한 세자 책봉 문제가 빌미가 되어 남인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그러다가 1694년 폐출되었던 민비의 복위를 계기로 남인은 정계에서 제거되는 대신 노·소로 분열되어 있던 서인이 재집권하는 갑술환국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노·소 사이의 불안한 연정이 지속되다가 1716년 노론 일색의 정권이 수립되면서 소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나타났다. 이 시기 남인은 청남·탁남으로, 서인은 노론·소론으로 분립하는 등 당파내의 이합집산도 무성했다. 이런 와중에 숙종의 미움을 받은 윤휴·허적·송시열·김수항·박태보 같은 명사들이 죽임을 당했다. 예송 논쟁으로 손상된 부왕의 권위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숙종의 정국운영 방식의 결과였다. 숙종은 환국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했다. 따라서 정쟁은 격화되었지만, 강화된 왕권으로 사회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에 집중할 수 있어 상당한 치적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시켜 100년 동안 벌인 사업을 완성하고, 양전을 계속 추진하여 전국에 걸친 양전을 마무리했으며, 양인의 군포 부담을 2필로 균일화했다. 그리고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통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상업발달과 민생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국방 분야에서도 다양한 사업이 이루어졌다. 대흥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도성을 크게 수리했으며, 1712년 북한산성을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한 금위영을 창설하여 5군영체제를 확립했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 계속된 군제 개편이 사실상 완료되었다. 명나라에 대한 은공을 갚는다는 뜻으로 대보단을 세우고, 성삼문 등 사육신을 복관시켰다. 노산군을 복위시켜 단종으로 묘호를 올리고, 폐서인되었던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시켜 민회빈으로 정명하는 등 왕실의 관계를 재정립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300여 개의 서원과 사우가 건립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숙종은 민비를 내치거나 총애하던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등 애증의 편향이 심하고 성격이 매우 급했다. 이러한 왕의 기질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당쟁을 격화시켰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수립한 숙종이 존재했기에 영조와 정조로 이어지는 문예부흥 시대를 열 수 있었다.

 

조선 19대 임금 이종(李倧)이 승하하자 신하들이 ‘숙종(肅宗)’이라는 묘호와 왕이 묻힌 능호를 명릉(明陵)이라 이름 지었다. 숙종은 6월 21일에 승하하여 12월 13일에 국장을 치렀으니 무려 6개월이 걸린 셈이다. 국장이 이처럼 오래 걸렸던 까닭은 왕릉을 조성하는 시간과 능지를 어디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풍수 때문이다. 왕릉을 결정하는 일은 국가의 중대사였다. 풍수학은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의 필수과목이었다. 고산 유선도와 우암 송시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숙종도 일찍부터 풍수에 일가견이 있었다. 1687년(숙종13) 10월, 원릉의 자리를 둘러본 숙종이 “무릇 일이란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한 것이거니와, 원릉을 전알하고 나니 내 마음이 시원해진다. …풍수들의 말 때문에 경솔하게 옮겨 모시기를 의논할 수는 없다.”며 천장을 하자는 풍수들의 의견을 일축하는 발언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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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대왕 명릉 ‘인현왕후부좌’ 라고 세겨진 비.(왼쪽) ‘인원왕후부우강’ 이라고 새겨진 비

■ 신라에서 조선으로 이어진 2천년 왕릉의 역사

예부터 왕릉은 죽은 왕이 잠시 거처하는 왕의 집으로 생각했다. 시조 박혁거세 왕릉부터 신라 초기의 왕릉은 모두 집처럼 지었다. 신라의 왕릉에 석물이 등장한 것은 제29대 태종무열왕릉부터이다. 제31대 신문왕릉에 병풍석을 세웠고, 제33대 성덕왕릉에 난간석이 등장했다. 평지가 아닌 산지에다 왕릉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은 제35대 경덕왕릉부터이다. 왕릉에 산소(山所)의 개념이 나타난 것이다. 산기운을 받으려 산허리에 터를 잡으면서 왕릉의 봉분 크기가 줄어들었다. 제38대 원성왕릉인 괘릉은 병풍석과 난간석, 문인석과 무인석을 갖춘 최초의 왕릉이다. 이렇게 완성된 신라 왕릉의 양식은 고려로 이어졌다. 조선왕조는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유교문화를 더했다. 따라서 유교와 풍수를 신봉했던 조선의 왕릉을 제대로 보려면 유교의 예제와 풍수택지라는 두 개의 창이 필요하다.

 

금천(禁川)을 건너 홍살문에 들어서면 왕릉으로 가는 긴 돌길 참도의 끝에 정자각이 자리 잡고 있다. 제물을 차리는 정자각 뒤쪽에 있는 둥근 언덕을 강(岡)이라 한다. 언덕이란 뜻의 ‘강’은 조선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생명을 키우고 지켜주는 생기(生氣)를 저장하는 곳이다. 왕릉 뒷부분에 봉긋 솟아 오른 곳을 잉(孕)이라 하는데, 생기를 불어넣는 곳이다. 숙종이 묻혀 있는 명릉은 강과 잉의 특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 형식보다 실질을 앞세우는 정책의 현장

사적 제198호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1470년(성종1) 10월, 이조에서 경기의 고양현을 승급시켜 군으로 삼았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서오릉이 능지로 선택된 계기는 1457년(세조3) 세자였던 원자 장(璋)이 죽자 풍수지리설에 따라 능지로서 좋은 곳을 찾다가 이곳이 추천되어 부왕 세조가 직접 답사한 뒤 경릉 터로 정하면서부터다. 그 뒤 1470년(성종1)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昌陵)이 들어섰고, 1681년 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과 1721년(경종1)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단릉을 아우르는 명릉(明陵)이 자리를 잡았다. 1757년에는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弘陵)이 들어서면서 ‘서오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록에 ‘서오릉’이 언급된 것은 1811년(순조11) 3월이다. 경내에 명종의 첫째아들인 순회세자의 순창원이 있으며, 숙종의 후궁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희빈 장씨의 묘가 1970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서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명릉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인원왕후의 능침의 방향과 위치이다. 슬하에 자식이 없던 인원왕후는 연잉군(영조)를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했다. 인원왕후가 승하하자 친히 행록을 지은 영조는 능을 파격적으로 결정했다. 원래는 왕의 오른쪽, 즉 임금이 누운 우측에는 능침을 마련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인원왕후의 능침은 숙종의 오른편에 있으며 위치도 더 높다. 백성들을 깊이 사랑한 실학의 군주 영조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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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도에서 바라본 명릉 전경

이경석(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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