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된 느낌의 짜릿한 사랑
- 오석륜
달빛이여,
조금만
아주 조그만
몸을 틀어서 지나가면
안 되겠니?
내 손길과
내 목소리가
그녀에게 불을 붙일 때까지만
<파문의 슬하>, 시인동네, 2018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물음은 유구하고 끈질겨서 인간의 땅 곳곳에 비탄과 환의를 불러일으킨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사랑은 처음에 아름다움에서 발생하여, 다음에는 친절로 확산되고 신체적 욕망으로 확산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세속적으로 풀어보자면,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보고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런 후에 손도 잡고 입도 맞추는 감정의 확산 과정이 사랑이라는 것일 터인데, 이는 ‘사랑의 발생학’이라 불러도 될듯하다.
사랑은 개념으로 설명될 문제라기보다는 행위와 감정으로 이해되어질 문제다. 흄은 친절이란 영혼의 세련된 정념이고, 육체의 욕망이란 거칠고 통속적인 정념이라 했다. 그래서 사랑은 통속과 세련을 함께 갖는다는 그의 주장이 한결 멋있어 보인다.
오석륜 시인의 시 <정전의 감정>은 세련과 통속의 아찔한 경계를 아름답게 오가고 있어 매력적이다. 전기가 끊어져 깜깜해진 ‘정전’의 순간을 사랑의 감정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은 정말로 멋진 수사다. 남녀가 같이 있는 외진 방에 갑자기 정전이 되었을 때, 그 어둠 안에는 수없는 떨림과 머뭇거림과 흥분이 보이지 않게 소용돌이친다. 그런데 얄밉게도 환한 달빛이 창가로 스며든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농익어가는 사랑의 감정이 달빛에 훤히 드러나게 되면 서로가 멋쩍어질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남자의 애틋한 노력이 허사가 될 판이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달에게 간절히 빈다. “조금만/아주 조그만/몸을 틀어서 지나가면/안 되겠니?”라고. 당사자에게는 절박하고 심장이 타는 상황이겠지만 보는 이에게는 설핏한 웃음을 짓게 하면서도 내심 부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손길과 목소리가 “그녀에게 불을 붙일 때까지만” 몸을 틀어 달라고 달에게 애원하는 남자의 심사는 세련과 통속의 경계를 오가는 아득한 사랑의 감정을 잘 드러낸다. “불을 붙일 때까지만”이라는 마지막 표현이 함축한 여운의 맛이 또한 만만치 않다. 독자에게 ‘그 다음에는?’이라는 설레는 물음과 과연 ‘달은 몸을 틀었을까?’라는 의문도 품게 한다. 그 뒷일이 나도 궁금하다.
격조만 있는 사랑은 공허하고 통속만 있는 사랑은 비속하다. 오석륜 시인의 시 <정전의 감정>은 엉큼하면서도 격조 있게 사랑의 욕망을 드러낸다. 은근하면서고 솔직한 감정의 표현이 독자의 심사를 흔들어 ‘정전’과도 같은 짜릿한 사랑의 미로 속으로 한껏 몰입하게 만든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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