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에서 생생히 살아난 조선 르네상스 ‘명재상’
<홍재전서>에 실려 있는 정조(1752~800)의 말이다. 역사와 그림이라는 전혀 다른 소재를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 정조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림을 잘 그리는 자는 정신을 그리지 형태에 연연하지 않으며, 역사를 잘 기술하는 사람은 상황을 기록하지 일을 중시하지 않는다.”
채제공과 정조시대의 진경문화
수원 화성박물관에 가면 명재상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초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보물 제1477-1호로 지정된 ‘채제공 초상 시복본’은 정조 시대의 진경문화를 드러내는 명작이다. 족자의 전체 크기는 170.0×90.0이고 그림은 120.0×79.8이다. 박물관은 5점의 채제공의 초상 흑단령포본 초본, 즉 기름종이에 그려진 밑그림도 수장하고 있다.
이 역시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초본은 초상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되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 속의 채제공이 잡고 있는 부채에 달린 선추의 실물도 볼 수 있다. 선추는 부채의 자루에 다는 장식품인데, 선추 안에 향을 넣어 향낭, 또는 향합이라고 부른다. 선추 역시 정조가 선물한 것이다.
채제공의 얼굴은 선이 굵은 미남형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얼굴이 살짝 얽은 곰보인데다 한 쪽 눈이 이상하다. 채제공은 사시였던 것이다. 털 한 가닥도 틀리게 그리지 않는다는 화론을 실감하게 된다.
채제공의 초상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려면 정조가 규장각에 설치한 ‘자비대령화원’이란 제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비대령화원이란 국왕이 ‘임시로 차출하여 왕명에 대기하는 화원’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뽑힌 화원은 1년에 4차례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국왕이 평가를 주관했다. 이런 제도를 통해 정조시대의 회화가 절정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규장각 도서의 그림, 왕실행사의 절차를 그린 반차도, 국왕의 초상화 제작을 주로 담당했다. 채제공의 초상을 그린 이명기는 김홍도, 김득신 등과 함께 자비대령화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정조는 대신들에게 초상을 자주 선물하여 친밀감을 보여주었다. 본인의 초상화를 세 차례나 그렸을 정도로 초상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다운 모습이다. 채제공은 그 혜택을 톡톡히 누린 당사자였다. 채제공은 청백리 오리 이원익과 함께 가장 많은 초상화를 남긴 재상으로 꼽힌다. 채제공의 초상화를 보면 ‘터럭 한 올이라도 실물과 닮지 않으면 곧 타인’이라고 생각했던 당대 화가들의 고심을 읽을 수 있다. 화가는 초상 속에 인물의 정신과 성품을 담아내려 했는데 이것을 ‘전신(傳神)’이라 한다. 이를 위해 화가들은 대상 인물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동시에 일상에서의 행동과 태도도 눈여겨보았다. 인물의 내면은 행동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림을 주목해 보자. 그림에 적힌 글을 통해 채제공의 73세 초상이며 정조15년(1791) 이명기가 어진을 그린 다음 어명을 받아 채제공의 초상을 그려 대궐로 들여보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왼편에 채제공이 직접 쓴 자찬문이 눈길을 끈다.
이형이정爾形爾精 부모지은父母之恩 네 모습과 네 정신은 부모님의 은혜이고
이정이종爾頂爾踵 성주지은聖主之恩 네 머리부터 네 발끝까지 성군의 은혜로다.
선시군은扇是君恩 향역군은香亦君恩 부채도 임금의 은혜, 향 또한 임금의 은혜이니
분식일신賁飾一身 하물비은何物非恩 온 몸을 꾸민 것 은혜 아닌 게 무엇인가
소괴헐후所愧歇後 무계보은無計報恩 부끄럽게도 무능하여 그 은혜 갚을 길이 없네.
화산관 이명기와 단원 김홍도
다산 정약용은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 화가 김홍도와 이명기를 소개하는 글을 남겼다.
“김홍도는 풍속과 여러 사물의 모양을 잘 그렸으며, 또한 화초와 오리, 기러기도 잘 그렸다. 그리고 이명기는 특히 초상화로 이름이 났는데, 먼저 임금인 정조 때에는 어진으로부터 대신과 재상들의 초상까지, 혹은 낡은 초상화를 옮겨 그리는 작업도 명기가 다 했다.”
이명기는 김홍도보다 10살 이상 후배였으나 얼굴 그림만은 김홍도보다 뛰어났다.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이 <승정원일기>(1791년 9월 28일자)에 실려 있다. 이날 정조는 어진을 그릴 때 1차로 완성한 초본 석 점을 걸어 놓고 채제공을 비롯한 20여 명의 대신들과 초상화를 그린 김홍도와 이명기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그림을 품평했다. 신하들의 평을 들은 정조가 말한다.
“나의 얼굴색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변하니, 막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르고, 막 빗질하고 관을 쓸 때 다르고, 아침과 오후가 다르고, 오후와 저녁과도 달라서 무엇을 따라야할지 기준을 잡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런고로 나는 이명기에게 좋은 그림의 대상이 아니라고 한 것이요, 이래서 이 사람의 손에서 종내 나의 참 모습을 얻지 못하지 않을까 염려하던 바다.”
“초상을 살피는 법으로는 먼저 눈동자를 본다고 한다. 내 얼굴을 내가 비록 스스로 볼 수 없지만 서편의 유지본은 눈동자의 정채로움이 여러 본 가운데 으뜸이다.”라며 정조는 셋 중에서 눈동자가 가장 살아 있는 그림을 최종 선택했다.
정조가 김홍도와 이명기를 사신을 따라 북경에 다녀오도록 했던 일도 흥미롭다. 최고의 화가 두 사람에게 청나라의 사찰 탱화와 천주당의 벽화를 직접 견문할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귀국한 직후인 1790년 2월부터 김홍도와 이명기는 김득신과 함께 용주사 대웅보전의 ‘삼세여래체탱’과 칠성각의 ‘칠성여래사방칠성탱’을 제작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듬 해 이명기가 정조의 어진과 채제공의 초상화를 그렸다.
조선의 위대한 역사는 명군과 명재상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전기의 세종과 황희, 후기의 정조와 채제공은 이를 웅변한다.
1758년, 영조는 39세의 채제공을 도승지에 임명했다. 이 무렵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관계는 위태로웠다. 급기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한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사실을 확인한 채제공은 불같이 화를 내는 영조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극력 만류하여 결국 명을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훗날 영조는 정조에게 말한다. “나와 너에게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은혜를 온전하게 해 준 사람은 채제공이다. 나에게는 순신(純臣)이지만 너에게는 충신이다. 너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채제공은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한 정조의 개혁정책을 충실히 보좌했다. 세손 때부터 노비제 폐지를 구상했던 정조의 특명을 받은 채제공이 시노비의 폐단을 교정하는 조목을 만들었던 일은 주목해야할 일이다. 이 조목은 국가가 노비를 찾아주는 노비추쇄관제를 없애고 시노비의 수를 차츰 줄여 정조의 서거 직후인 1801년에 4만 명의 시노비를 해방시켰던 바탕이 되었다. 조선 최초의 시장 자유화 조치로 불리는 ‘신해통공’(1791) 역시 채제공이 주도한 일이다.
채제공의 가장 큰 공적은 역시 화성성역이다. 화성유수부의 초대 유수에 임명된 채제공은 1794년 정월, 화성 성역을 시작하면서 영의정 겸 총리대신으로 축성의 총책임을 맡았다. 10년 예상하고 시작한 공사를 2년 6개월 만에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중심으로 정약용을 비롯한 개혁세력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총동원했기 때문이다. 거중기를 비롯한 기계를 제작하여 현장에 투입하고 벽돌을 사용했으며, 떠도는 백성들을 고용해 건설 현장에 투입하고 임금을 지불했다. 성역을 마친 후 채제공은 화성 건설의 모든 과정을 담은 종합보고서 <화성성역의궤>를 편찬했다. 이 책에는 1,800여명의 기술자들의 명단과 이들에게 지불한 임금까지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1799년 1월, 채제공은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비보를 들은 정조는 절절한 마음을 담은 추도사를 남겼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나는 참으로 이 대신과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오직 나만 아는 오묘한 관계가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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