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의 예감… 따뜻함으로 교감
-자화상
이윤훈
앞뜰의 노란 붓꽃이
잠시 실바람을 그리고
고양이의 줄무늬 건반을 살짝 치다 지우고
허공에 방울새를 띄었다 지우고
나를 금생의 한 풍경으로 쓸쓸히 앉혔다
누가 후생에서 쓸쓸히 나를 보고 있다
<생의 볼륨을 높여요>, 시인동네, 2018.
빈센트 반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이다. 고갱과의 말다툼 끝에 귀를 자른 고흐가 동생 테오를 안심시키기 위해 편지 대신 초상화를 그려 보냈다고 한다. 글보다 얼굴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심정을 얼굴을 통해 말하려는 것이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일 것이다. 뒤러, 렘브란트, 뭉크, 윤두서 등 유명화가들이 그린 자화상은 자신의 얼굴이 이렇게 생겼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이런 말을 하고 싶다는 고백의 심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인들이 ‘자화상’이라 제목의 시를 쓰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나의 얼굴은 타인에게 건네는 고백의 말이고, 그 말은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꽃들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제반의 행동들은 결국 나를 응시하고 성찰하는 것이다.
‘자화상’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이윤훈 시인의 ‘붓꽃이 있는 풍경’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라기보다는 ‘붓꽃’이 그린 시인의 초상화에 더 가깝다 할 수 있다. 내가 그린 나의 모습보다 남이 그린 나의 모습이 더 진실해 보일 때가 많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 없다. 거울이 잔인한 이유는 감추고 싶은 것까지 남김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에 드러난 붓꽃의 이미지는 노란 물감을 머금은 붓을 연상시킨다.
‘실바람’과 고양이의 ‘줄무늬 건반’과 ‘방울새’를 그렸다 지우는 붓꽃의 손놀림은 사물을 비치는 거울처럼 주변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붓꽃이 그린 화폭 안에 시인은 ‘금생의 한 풍경’으로 쓸쓸히 앉혀진다.
실바람과 고양이와 방울새를 그렸다가 지운 자리에 그려진 ‘나’의 초상화는 ‘금생’에도 쓸쓸하고 ‘후생’에서도 쓸쓸할 것 같다는 어떤 예감의 표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쓸쓸함의 예감이 허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붓꽃을 바라보는 시인의 얼굴과 시인을 바라보는 붓꽃의 얼굴은 쓸쓸함보다는 따뜻함으로 교감하는 하나의 얼굴일 것이다. 쓸쓸함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따뜻함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붓꽃’의 꽃말은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기쁨은 얼굴에서 나와 얼굴로 전해진다. “얼굴은 말한다. 모든 말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말을 시작하는 것이 얼굴이다.”라는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말을 신중히 떠올려본다.
신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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