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8. 공생과 대동의 정치를 생각하는 여주 대로사

치열했던 당쟁 관통한 송시열… ‘소통의 정신’ 깃든 곳

정조대 노론의 영수로 활동한 우의정 몽우 김종수가 쓴 대로사 현판
정조대 노론의 영수로 활동한 우의정 몽우 김종수가 쓴 대로사 현판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하리라

 

이 시조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의 작품이다. 푸른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산수 간에서 물 흐르듯 살고 싶다고 노래했던 송시열의 80평생은 바람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당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대의 한복판을 걸어간 학자이자 정치가로 여전히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 송시열, 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끌었던 정조는 송시열을 공자나 주자처럼 ‘송자(宋子)’로 높여 불렀다. 고종의 밀사이며 뛰어난 역사학자였던 호머 헐버트는 자신이 지은 <한국사>에서 송시열을 ‘조선의 철혈재상’으로 표현했다. 역사가 이덕일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정조가 대로(大老)로 높였던 송시열을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노론의 당익을 지키는데 목숨을 걸었던 ‘편벽한 소인’으로 규정했다.

 

이처럼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예나 지금이나 극단을 달린다. 성리학의 대가였으며 나라의 원로로 국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던 송시열이지만 세종이나 정조, 퇴계나 율곡 같은 인물들과는 달리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천 번이나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왜 우리 시대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를 이끌고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박규수가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아 쓴 강한사 현판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를 이끌고 평안도 관찰사를 지낸 박규수가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아 쓴 강한사 현판

■ 정읍에서 사약 마시고 83세에 운명

1607년 충청도 옥천에서 태어난 송시열은 유년 시절에 부친 송갑조에게 학문을 배웠다. 부친에게 율곡의 <격몽요결>을 배운 열두 살의 소년 송시열은 “이 글처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24세에 율곡의 수제자 김장생에게 배우고, 스승이 별세하자 그 아들 김집에게 배웠다. 1636년에 천거를 받아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어 8개월을 가르쳤다. 그해 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갔다가 인조가 항복을 결정하자 바로 낙향해버렸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배웠던 그에게 국왕 인조의 항복은 패륜행위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기축봉사>를 올려 대청복수를 주장했다. 내리는 벼슬을 매번 거절하다 1658년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자 출사하여 효종과 독대하며 북벌을 논의했다. 그러나 효종과 뜻을 함께 한 시간은 너무 짧았다. 이듬해 효종이 승하하자 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을 것인가를 두고 남인과 예송논쟁을 벌였다. 천하의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예를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로 여겼던 송시열 같은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런 일이었다.

대로사 기적비와 관리 건물인 추양재 기실비-일중 김충현의 글씨
대로사 기적비와 관리 건물인 추양재 기실비-일중 김충현의 글씨

1674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갑인예송을 벌였다. 현종이 남인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송시열은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 이 무렵부터 주자의 저서에 주석을 붙인 <주자대전차의>를 펴내기 시작했다. 1683년에 김석주와 함께 공작정치로 남인을 탄압했던 김익훈을 옹호하여 서인 내 소장학자들을 실망시켰다. 

1685에 동문수학한 친구 윤선거의 행적을 비난하여 그 아들인 제자 윤증과 사이가 벌어졌는데, 이 무렵부터 윤증을 공개리에 배척하면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1689년에 장희빈의 아들인 원자의 책봉을 서둘지 말라고 건의하여 숙종의 미움을 받은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6월에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마시고 운명했다. 향년 83세. 1694년에 관직이 회복되었으며, 1756년에는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에 종사되었다.

사당과 서원의 기능을 한 대로서원 혹은 강한사
사당과 서원의 기능을 한 대로서원 혹은 강한사

■ 1785년 정조가 사액 내려 ‘사액서원’

여주에 송시열을 기리는 사우가 들어선 것은 사후 40년이 지난 영조 때였다. 송시열은 살아생전 여주에 머물 때마다 대로사 자리에서 효종의 능인 영릉을 바라보고 비통해 하였으며, 후진들에게는 북벌의 대의를 주장했다고 한다. 

1731년에 문정공 이재를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이곳에 송시열을 기리는 영당(影堂)을 세웠다. 그러나 영당을 세운 지 10년이 지난 1741년에 영조의 명으로 영당은 헐리고 말았다. 이후 노론 사림들은 오매불망 영당을 복원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1779년 8월 5일, 효종이 서거한 지 2주갑(120년)을 맞은 정조는 영릉을 참배하러 여주에 행차했다. 이때 정조는 정운기를 비롯한 경기도 유생들의 요청을 받고 이렇게 화답했다.

 

“이 고을은 효묘의 능침이 있는 곳이고 또 선정[송시열]이 소요한 곳이니, 제향할 곳을 세워서 제사를 같이하는 뜻을 대략 붙이는 것이 정으로나 예로나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다. 특별히 청을 허락한다.”

중문에서 바라본 대로사 전경
중문에서 바라본 대로사 전경

영당이 헐린 지 40여년 만에 우암을 제향하는 대로사(大老祠)를 짓도록 허락 받았던 것이다. 대로는 “덕망이 높은 노인”이란 뜻이다. <정조실록>에 “대로란 두 글자는 다만 예부터 천하대로(天下大老)란 글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선정(先正 : 송시열)의 문집 가운데에 뛰어난 구절을 모아 편집하면서 그 책의 제명을 <대로일고>라 하였으니, 이에서 따온 것이다”라는 정조의 말이 실려 있다. 6년이 지난 1785년에 정조가 사액을 내려 대로사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후 대로사는 경기지역 노론의 주요한 거점 역할을 하며 약 백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 흥선대원군 서원 철폐… ‘대로사’는 살아남아

여강 변에 위치한 대로사는 서쪽을 향해 효종의 무덤인 영릉을 바라보고 있다. 효종과 북벌을 추진하던 이완 대장의 묘도 영릉을 향하고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대로사비각, 중문을 지나면 대로서원 강당, 삼문을 지나면 우암의 영정을 모신 대로사 본채가 나온다. 먼저 대로사비각부터 살펴보자.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84호인 이 비각은 1787년 11월 송시열이 태어난 뒤 세 번째 맞는 회갑년(180년)을 기념하여 정조가 친히 비문을 짓고 전서로 글씨를 쓴 비석을 세웠다. 장대한 비석 우측 상단에 ‘어필’이라는 글씨가 있다. 비면에는 사당을 세우는 대의와 우암의 덕을 칭송하는 내용, 그리고 정조가 영릉을 배알한 후 대로사와 비를 세우게 한 배경이 빼곡히 적혀 있다. 국왕의 통합력으로 노론을 포용하고자 하는 정조의 포부와 자신감이 담겨져 있다.

 

대로서원 강당은 팔작지붕에 정면 6칸 측면 4칸의 품위 있는 건물이다. 당에 올라서니 여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시원하다. 강당 처마 밑에는 정조대 명필 중의 한사람인 황운조가 휘호한 ‘대로서원’ 현판이 걸려있다. 또 안에는 전서의 대가인 이한진의 전서로 된 ‘첨백당’과 황운조가 행서로 쓴 ‘강한루’ 편액, 이기진이 지은 ‘강당상량문’과 1785년에 이조판서 서유린이 짓고 쓴 ‘대로사상량문’도 걸려 있다. 

장린문에서 바라본 대로사
장린문에서 바라본 대로사
강당 우측의 장린문을 들어서면 대로사 본채가 나타난다. 영릉이 위치한 서쪽을 바라보게 세워진 사당에는 송시열의 복제본 초상화가 걸려있다. 사당의 정면에는 1785년 9월에 사액 받을 때 정조의 명을 받들어 규장각제학 김종수가 쓴 ‘대로사’ 현판이 걸려 있다.

 

이러한 대로사도 사액서원이라는 권위를 빌어 탈법을 일삼다가 정조의 분노를 산 일이 있다. 1791년 3월, 승지 박황이 여주 목사로 있다가 돌아와 여주에서 불법으로 군사를 징발하는 비리를 숨김없이 보고하자 정조가 이렇게 선언했다.

 

“(대로사가) 별도로 정원수 이외의 명목을 만들어 군역을 피하는 소굴로 삼고 있으니, 어찌 이런 법도가 있단 말인가. …대로사는 곧 내가 특별한 감회가 있어 세운 것인데 이제 그 원우(院宇)에도 원납이란 명목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있다 한다. 그러니 반드시 특별한 분부를 내려 신설한 곳부터 금지하도록 한 뒤에야 다른 서원에서도 두려워할 줄 알게 될 것이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47개만 남기고 대부분 철폐했을 때도 대로사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이때 명칭을 강한사로 개명했는데, 흥선대원군이 스스로를 ‘대로’라 했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실학자였던 대제학 박규수가 왕명을 받들어 쓴 ‘강한사’라는 현판이 남아있다. ‘강한’은 여주의 풍광이 아름답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정조의 어필 ‘대로사비’
정조의 어필 ‘대로사비’

■ 조선후기 ‘이분법적 논리’ 배격… 뜻깊은 공간

조선 후기에 노론은 군자당이며 소론이나 남인은 소인당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당론화하였다. 이러한 독선은 당쟁을 극한까지 격화시켰다. 이러한 독선을 뒷받침하는 송시열의 발언이다.

“모든 일에는 두 편의 나뉨이 있으니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그르게 마련이다. 옳은 것은 천리이고 그른 것은 인욕이므로, 옳은 것을 지켜서 잃지 말 것이며 그른 것은 남김없이 제거해버려야 한다”

 

대결만 있는 정치판에서 민생이 중심이 될 리가 없다. 정조가 송시열을 ‘송자’로 높이고 대로사의 건립을 허락했던 것은 남인과 소론과도 소통하고 협력하는 공생의 정치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로사는 송시열을 기리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대동정치를 추구했던 정조를 기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대로사가 상생과 대동의 정치를 꿈꾸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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